▲영화 < 1987 >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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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도 각별한 해로 기억된다. 우선 나이 마흔이 꽉 찬 나이에 결혼을 했고, 첫 아이를 얻었다. 1월에 결혼하여 11월에 아이를 낳았다.
여름에 '가톨릭농민회' 태안분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서산과 해미, 합덕, 신례원 등지를 다니며 다른 지역 농민회와의 연대를 공고히 했다. 상급 농민회로부터 입수한 1980년 5월의 광주 참상을 담은 비디오를 태안성당 신자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독일인 기자가 몰래 찍은 그 비디오를 태안성당에서 공개하는 문제로 서산경찰서 정보과 형사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1987년의 '공정선거감시단' 활동 그해 가을에는 서산 제일감리교회에서 제13대 대통령선거 공정선거감시단 서산군지부를 결성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태안성당에 공정선거감시단 태안본부 사무실을 두고 태안 쪽 활동을 총괄 지휘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가슴이 뭉클하기도 한다. 우선 당시 태안성당 강당의 원래는 재래식 부엌이었던 빈 공간을 공정선거감시단 사무실로 사용하도록 선처해준 박연호 신부께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 크다. 박연호 신부는 훗날 환속을 한 탓에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도 없어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태안성당에 공정선거감시단 태안 사무실을 앉히자 신자 아닌 이들도 찾아와 격려를 해주었고, 대학생들이 여럿 찾아와서 몸으로 뛰는 활동을 맡아주었다.
공정선거감시단은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의 당선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 사실상의 목표였다. 그러려면 전두환·노태우 쪽의 부정선거를 감시하고 차단하는 것이 필수였다. 정말이지 공정선거감시단은 부활한 직선제 속에서 군부독재 정권의 연장을 막아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상위 조직에서 내려오는 것은 갖가지 유인물과 포스터뿐이었다. 돈은 한 푼도 내려오지 않았다. 모든 경비는 자체 조달로 해결해야 했다. 태안성당 박연호 신부님과 나중에 고인이 되신 사거리 '국민약국' 정한문 선생을 비롯한 여러 아는 이 모르는 이들이 경비를 보태주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도 살림 비용을 줄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