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백비
제주다크투어
4·3기념관에 누워있는 '백비'의 침묵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인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6명이 희생된 이후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불법적인 탄압과 폭력이 끝없이 자행됐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무장봉기가 발발했다. 단정단선 반대 주장도 유독 제주에서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펼쳐졌던 것임을 살펴봐야 한다.
1948년 4월12일 한국여론협회가 서울 종로와 충무로를 지나는 시민 126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단 6.6% 만이 자발적으로 선거인 등록을 한 것으로 답했다. 절대 다수가 선거인 등록을 거부했거나 강압에 의해 등록한 것으로 답한 데서도 드러난다.
일제의 폭압적 식민통치 아래 신음하다 해방된 땅에서, 해방된 지 2~3년 밖에 안 된 시점에서, 통일된 독립국가 건설을 외친 당시 제주도민들의 뜻이 어떤 것이었는지 헤아려야 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로 무차별 학살당한 것으로만 이해된다면 어쩌면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 그 발발 원인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와 연구를 통해 4·3은 그에 걸맞은 이름을 찾아야 한다.
미국의 책임을 밝히는 문제도 가볍지 않다.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의 하나인 4·3이 미군정 시기에 발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국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국의 책임을 묻는 운동과 함께 관련 자료 발굴과 연구도 이루어져야 한다. 진압 과정에서 미국이 개입한 근거를 미군 G2보고서 외에 작전·군수보고서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미국은 엄청난 학살 피해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과거사 해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절차의 하나로 '책임자 처벌' 문제가 남는다. 국가폭력의 책임자들이 모두 사망한 상황에서 법률적인 처벌은 불가능하지만 역사의 심판마저 지나칠 수는 없다. 가혹한 탄압을 명령하면서 서북청년단을 제주에 내려보내 상황을 악화시킨 4·3의 1차적 책임자 이승만을 비롯해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강경진압을 주장해 수많은 양민 학살을 야기한 조병옥, 해안선에서 5km를 벗어난 지역의 통행금지와 이를 위반한 사람은 무조건 총살하도록 하는 포고령을 발표한 초토화작전의 책임자 9연대장 송요찬, 북촌리 사건을 비롯한 집단학살의 직접 책임자인 제2연대장 함병선, 제주도 총무국장 고문치사 등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저지른 서북청년단 제주도위원장 김재능, 마약 중독자로 온갖 잔혹한 짓을 일삼은 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 등 4·3과 관련한 '반헌법행위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이와 함께 비이성적인 만행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무고한 도민들의 목숨을 구했거나 제주도민의 진실을 대변한 의인들 또한 발굴·기록되어야 한다.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벌이고 무차별 진압에 반대하다 쫓겨난 9연대장 김익렬,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도민들에 대한 학살명령을 거부했던 성산포 경찰서장 문형순 등을 포함해 묻혀있는 의인들이 대상이다. 제주도 전역에 마을마다 크고 작은 공헌을 했던 의인들이 많이 있다.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절 소설 <순이삼촌>을 통해 4·3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 군사정부로부터 모진 고초를 당한 소설가 현기영, 시 '한라산'을 썼다가 옥고를 치른 시인 이산하, <제주민중항쟁>을 펴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른 시인 김명식 등을 포함해 우리가 채 알지 못하고 있는 유명 무명의 인사들을 70주년 추념식에 초청해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위로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