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집이 터지고 진물이 사라진 상태지만 흉터가 남았다.
고기복
좋아하는 닭고기마저 손사래 쳐야 하는 이유 석 달 가까이 구직활동을 하다 겨우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소피아가 마지막 밤을 보내며 친구들에게 한 턱 낸다고 했다. 오랜 실직으로 한 푼이 아쉬울 그가 치킨을 샀다. 월급이나 받고 쏘라고 했지만, 한사코 같이 있던 친구들을 대접하고 떠나고 싶다며 고집한 일이었다. 그렇게 마련된 자리였는데 캄누엔은 치킨을 입에 대려고 하지 않았다. 소피아는 순간 '아차' 싶었다. 너무 들떠 있어서 캄누엔의 형편을 살피지 못했다는 걸 직감했다.
동상에 걸린 캄누엔은 벌써 한 달 넘게 돼지고기와 닭고기를 먹지 않고 있다. 원래 먹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닭고기라면서도 손사래 치는 이유가 있다. 캄누엔은 음식에도 궁합이 있다고 믿는다. 동상에 걸려 약을 먹는 동안 찬 음식을 피하려다 보니 입에 군침이 돌아도 마다하고 있다. 돼지고기 역시 찬 음식이라며 피하고 있다.
캄누엔은 프놈펜에서 네 시간 거리의 시골에서 자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짓는 부모를 떠나 일본 오토바이 부품 조립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회사에는 또래 여자아이들이 많았다. 한 달 꼬박 일해도 손에 쥘 수 있는 목돈은 없었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께 남동생 학비와 함께 용돈을 보내고 나면 친구들과 간식 사 먹을 여유도 없었다. 덕택에 남동생은 고등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
동생은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한국어를 배웠고, 외국인 고용허가 이주노동자로 선발되었다. 서울의 한 가구공장에서 일하게 된 동생이 보내온 소식은 놀라웠다. 동생은 캄누엔이 가장 많이 받았던 월급의 10배가 넘는 급여를 받고 있었다. 캄누엔은 동생에게 자신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런 캄누엔에게 부모님은 동생이 외국에 가 있으니, 언니처럼 고향에서 농사를 도우는 게 어떠냐고 했다. 언니는 중학교 밖에 졸업하지 않았고, 고향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동생이 한국으로 가기 전까지 실질적인 가장 역할은 캄누엔이 해 왔었다. 일본인이 세운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 캄누엔은 한국이라고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알려준 방법대로 고용허가제 한국어 시험 준비를 부모님 몰래 시작했다. 동생이 한국에 간 지 만 2년이 될 즈음 캄누엔은 한국에 농업이주노동자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공장에서 일하기를 원했지만, 어려서부터 해 왔던 농사일이라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지난 8월 입국했다.
일하게 된 곳은 전주의 미나리 밭이었다. 논에서 캔 미나리를 비닐하우스에서 다듬고 포장하는 일을 아주머니들과 함께 하는 곳이었다. 논에는 주로 남자들이 들어갔지만, 일이 많을 때는 여자들도 거들어야 했다. 농사일이란 게 부지런만 떤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경험으로 알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한국에서와 같은 추위는 난생 처음이었고, 손이 얼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요령을 알려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손발이 얼어 가렵고 부어올라서 사장에게 말을 하면 '잘 씻으면 된다'는 말만 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흘러들었다. 시간이 해결하겠지 하면서도 통증과 가려움증은 점점 심해졌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장갑을 낄 수 없을 정도로 물집이 커졌을 때 아주머니들이 난리를 쳤다.
캄누엔은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손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놔뒀다며 자신을 나무라는 것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발도 똑같은 증상이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그날로 사장은 캄누엔에게 회사를 그만두라고 했다. 오라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전주에서 그가 의지할 곳은 없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용인에 이주노동자쉼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작정 짐을 챙겨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