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다시 읽다사십대 중반에 다시 만난 시, 그리고 시집. 시인의 감성은 잊혀지는 게 아니고 굳어가는 것이다.
이정혁
첫 번째 사건은 감수성이 최고조에 이르던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고등학교 문예반 연합회 주최로 열린 백일장에서 또래의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했다. 객관적 기준의 미인은 아니지만 뽀얀 얼굴에 안경 낀 단발머리는 햇살처럼 눈부셨다. 나와 살짝 눈이 마주칠 때 방긋 웃어준 그 상큼한 미소. 아, 그녀도 내게 관심이 있구나. 착각은 언제나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그녀를 향해 끓어오르는 마음을 시에 담았다. 선배를 통해 그녀의 학교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약속한 날 두통을 핑계로 조퇴를 했다. 여학교 정문 앞의 교복 입은 남학생은 동물원 원숭이 이상의 관심거리다. 조롱 섞인 휘파람과 진심 없는 응원 따위가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볼 빨간 원숭이는 고개를 땅에 처박은 채 하염없이 그녀만 기다렸다.
전교생이 하교하고, 서서히 땅거미가 지고, 하늘 높이 뜬 달이 나를 비웃을 때쯤 상황이 파악되었다. 버스 열 정거장 거리를 걸었다. 집으로 돌아와 불 꺼진 방에서 라이오넬 리치의 < hello>를 무한 반복으로 틀어 놓고 울었다(그 당시의 영어 실력으로는 모든 가사가 절절하게 내 심장을 후벼팠다. 요즘 다시 들으면 'hello'만 들린다).
나중에 선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학교 앞에서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웃었던 건 그녀가 원래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한 번 더 그런 일이 발생하면 오빠를 부른다 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동생을 둔 오빠들은 아주 무섭다. 냉철한 상황 판단으로 그녀를 단념했고, 시도 잠시 접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에게 감사한다. 그녀 덕분에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