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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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는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유지를 실천하고 있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다가 패망 후 A급 전범 혐의로 체포된 뒤 극적으로 살아나 총리대신까지 된 기시 노부스케는 패망 이전의 일본을 회복한다는 목표로 정치활동을 했다. 일본의 영광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의 못다 이룬 뜻은 외손자인 아베 신조의 군사대국화 노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팀 빌은 <북한과 미국, 대결의 역사>에서 한국 역사를 정리하는 대목에서 이런 말을 했다.
"16세기에 접어들어 일본의 쇼군 히데요시는 아시아 본토로 일본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계획- 곧이어 20세기에 되풀이된 계획-으로 두 차례 조선 침공을 시도했다."쇼군은 한국어 어감으로는 '장군님'이다. 무신정권 지도자를 지칭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쇼군이 아니었지만, 서양 학자의 눈에는 쇼군과 다를 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쇼군으로 지칭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 침공이란 것은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도발을 가리킨다.
"곧이어 20세기에 되풀이된 계획"이라는 구절에서 드러나듯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팽창 정책이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20세기 일본인들에 의해 계승됐다는 게 팀 빌의 인식이다. 16세기나 20세기나 일본이 한반도를 경유한 대륙 침공을 통해 팽창정책을 추구했으므로, 기시 노부스케 등을 도요토미의 후계자로 보는 팀 빌의 인식은 틀리지 않다. 이런 인식에 입각하면, 기시 노부스케를 계승하는 아베 신조도 궁극적으로는 도요토미의 후계자가 된다.
조선 정치인을 하대했던 도요토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아베 신조는 대륙팽창의 의지만 같은 게 아니라 조선 정치인을 대하는 태도마저 비슷하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 2년 전인 1590년, 황윤길·김성일이 이끄는 조선통신사 일행의 방문을 받았다.
이때 도요토미는 관행을 어기고 의도적으로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 선조 24년 3월 1일자(1591년 3월 25일자)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도요토미는 대마도까지 사람을 보내 조선통신사를 영접하던 관행을 일부러 깨뜨렸다. 1868년 이전의 대마도는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했다. 일본은 자국 영토가 아닌 대마도까지 와서 조선 사신단을 영접했던 것이다. 이런 관행을 깨고 도요토미는 일본 땅에서부터 통신사를 영접했다.
또 통신사 일행이 도읍인 교토에 도착했을 때, 도요토미는 그곳에 없었다. 통신사 일행이 1개월 반쯤 기다리자 도요토미가 교토에 나타났다. 그러고도 그는 곧바로 만나주지 않았다. 약 2개월 뒤에야 통신사와의 면담을 허락했다.
위의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면담 당일에도 외교적 결례가 많았다. 쏘아보는 듯한 시선으로 사신단 앞에 나타난 도요토미는 방석 몇 개를 포개고 앉았다. 아베 신조가 자기 의자를 높인 것처럼, 도요토미도 방석을 높였던 것이다. 전반적 분위기로 볼 때, 방석을 포갠 행위는 위압감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랬기 때문에 사신단이 본국에 돌아와서 그 점을 보고했을 것이다.
무례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도요토미 측은 사신들 앞에 놓인 탁자에다가 탁주와 떡 한 접시만 달랑 내놓았다. 그러다가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이번에는 아기를 안고 나왔다. 그러다가 얼마 안 있어 사라졌다. 모욕적인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의도적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행동들이었다.
당시, 도요토미는 대륙침략 의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임진왜란 7년 전인 1585년에는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를 만난 자리에서 "조선을 점령한 뒤 중국까지 공격하겠다"고 장담했고, 1588년부터는 대마도 도주를 통해 조선 침략의 가능성을 조선 쪽으로 흘려보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의도적인 외교적 결례가 있었다. 도요토미가 그렇게 한 것은 조선 사신과 조선 정부의 기선을 제압하고 위압적인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주도록 압박하려는 동기가 깔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