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군 능주에 있는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 유허비. 조광조는 정일하고 은미한 의리를 강조했다.
이주빈
새로운 세상을 함께 도모했던 왕은, 배신했다. 유약한 왕은 청산해도 시원찮을 적폐세력과 손잡고 그를 유배 보냈다. 하필이면 전라도 능주(綾州)였다. 능주의 옛 이름은 '이릉부리', 큰 고을이라는 뜻이다.
이릉부리로 유배온 지 한 달 만에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왕이 내린 사약(死藥)을 받았다. 중종 14년 12월이었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동지의 배신. 그는 통한 서린 절명시(絶命詩) 한 편을 남기고 사약을 삼켰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랫 세상을 굽어보니/ 충정을 밝게 비추리."그리고 약 150여 년이 흐른 1667년, 후대들은 그의 유배지에 적려유허추모비(謫廬遺墟追慕碑)를 세운다. 유허비 설립을 주도한 이는 능주 목사 민여로였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썼고, 송준길의 글씨를, 민유중이 전서로 새겼다.
유허비는 '한 인물의 자취를 밝히어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를 말한다. 후대들이 후세에 알리고자 했던 조광조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조광조는 의리(義理)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왕에게조차 "의리에 대해서 생각이 짧기도 하고, (의리를) 계속 쌓으려는 노력도 부족해서 정사(政事)를 처리함에 있어 시비가 일어 근심스럽다"라고 대놓고 쓴 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조광조가 유달리 강조했던 의리는 어떤 의리였을까. 그는 "정일(精一)하고 은미(隱微)한 의리"라고 잘라 말했다. 정일(精一), 마음이 매우 깨끗하고 한결같다는 말이다. 은미(隱微), 안 보일 정도로 희미하고 섬세하다는 말이다. 조광조가 말하는 의리는, 깨끗한 마음이 한결같고 매우 섬세한 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