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민협 강민수 간사와 이야기 나누는 정동식 님
종교계노숙인지원민관협력네트워크
정동식님은 고시원 방세를 못 내 결국 거리로 나앉았다. 20일 정도 거리노숙을 하다 노숙인 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아 노숙인 쉼터에서 6개월을 보냈다. 알코올중독이 치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쉼터생활에 적응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쉼터에서도 나와 알코올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는 술이 아니라 독한 약에 취한 채 멍하니 하루하루를 보냈다. 자의입원이라 언제든 퇴원할 수 있었지만, 다시 거리노숙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병원에 있는 게 낫겠다 싶었다. 노숙인 지원센터의 과장님에게 지원주택을 소개받지 않았다면 병원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처럼 평생을 그곳에 있었을지 모른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저는 아직도 정신병원에 있었을 거예요. 쉼터에서도 생활했는데 쉼터에 가면 술을 못 먹잖아요. 술을 못 먹으니까 견디기 힘들었죠. 결국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됐죠. 정신병원에 입원 해보니까 밥 주고 약만 주는 거예요. 약 먹고 멍하게 앉아 있었죠. 아무런 삶의 의욕도 생기지 않았어요. 운동은 하루에 30분 정도만 할 수 있어요. 외출을 못하게 하는 건 아니었지만 돈이 없어서 외출을 못했어요. 담배는 하루에 5개피씩 배급받아 피웠고요. 밥 주면 먹고, 먹고 나면 자고를 반복하는 우리 속의 동물처럼 지내다보니 살이 15킬로가 쪘어요. 병원에서 더 우울했죠. 우울증은 거의 치료가 안 됐다고 봐야해요."정동식님의 얘기를 듣다보니 발음이 보통사람과 다르다. 정확하지 않고 어눌하며 말하는 속도가 느렸다. 원래 말이 느린 사람도 있으니 크게 신경쓸 일은 아니었으나, 내 짐작을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래도 정신과 약 복용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다.
"제가 발음이 안 좋은 건 사실입니다. 독한 약을 먹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고. 병원에 있을 때, 특별히 말할 사람도 없었고 환자들끼리만 얘기하다 보니 말을 더듬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 지원주택에 와서 많이 좋아졌어요. 병원에서 나와도 마땅히 갈 데가 없으면 다시 노숙을 해야 했는데 다행히 브릿지센터의 이효선 과장님을 만나 지원주택으로 입주하게 된 거죠. 술은 이제 거의 안 먹어요. 술을 마시면 다시 병원에 가야 하는데 병원 가는 거 생각하면 정말 무섭거든요.지원주택에 오고부터는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해졌어요. 이제는 일반 사회인이니까 직업도 정해야 하고, 저축도 해야하고… 우선은 이곳,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아주 잘해주세요. 사소한 문제도 의논하면 용기를 주시고, 힘도 주시고. 무엇보다 독립적인 주거 공간이 생기니까, 내가 누울 자리가 있으니까 행복합니다. 입주민들끼리 함께 영화도 보고, 야유회에 가서 여러 사람들과 친해지고, 음식도 나눠 먹고 하니까 사람 사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한 번도 집을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는 본인 소유의 집이 아니라도 '집'은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것은 인간으로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믿었다. 집이 없어서 단체 생활을 하고, 알코올중독을 치료하러 가서 주는 밥만 먹고 멍하게 하루하루를 살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나의 사생활을 온전히 보호받는 공간, 그 공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인간답게 살기도 하고 동물처럼 살기도 한다.
이창준님은 유방암으로 투병하던 아내를 간병하다가 생긴 빚으로 집을 잃었다. 집을 잃고 아내를 살렸으면 다행인데 안타깝게도 아내마저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다. 마침 인터뷰를 하러 간 날이 아내를 먼저 보낸 지 딱 3년이 되는 날이라고 했다.
아내를 잃고,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생을 마감하려 했다. 눈을 떠보니 정신병원이었다. 퇴원하고 싶었지만 가족(아들)의 동의 없이 퇴원을 할 수 없어 2개월 동안 반강제적인 병원생활을 했다. 성실하게 병원의 프로그램을 잘 따랐지만 아들은 끝까지 퇴원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병원장의 권한으로 퇴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돌아간 곳은 '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