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함석헌기념사업회
다른 종교를 통해서 함석헌은 자신의 종교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공개석상에 그는 자신의 종교관을 선포했지만 동시에 모든 종교를 평등하고 포괄적으로 포용하고 이해하려고 힘썼다. 그는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는 결국 하나라고 느꼈고,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진리도 받아들였다. 그는 기독교를 유일한 인류의 종교나 진리로 보기보다는 진리를 소유한 많은 인류의 종교중의 하나로 이해했다. 그리고 인간이 추구하는 진리의 세계가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 심지어 과학의 길을 통해서도 성취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런 그에게 인간이 궁극적 진리의 세계를 오직 하나의 종교만을 통해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함석헌의 비폭력 휴머니즘은 결국 자신의 종교와 이념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남의 종교와 이념도 아끼고 존중해야 한다는 영감을 내게 주었다.
1974년 11월, 함석헌은 윤보선(1897-1990), 김대중(1924-2009)과 공동으로 민주회복국민협의회(아래 민협)를 설립하고 공동의장이 되었다. 유신 선포 후에 야당인 신민당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민협은 사실상 재야에서 집권당인 박정희의 공화당 독주에 대항해 야당의 역할을 철저히 수행했다. 민협은 또한 도와 시를 포함한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는데, 1975년 3월에 이르러 민협은 전국적으로 50여 개 지방본부를 두고 있었다. 이 민협에선 "민주시민을 위한 헌장"을 발표했는데, 그 주요 요지는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모든 법적, 제도적인 조직기구에 대항해 민주시민은 저항해야할 것을 선포했다. 이 헌장은 민주적 저항운동으로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첫째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셋째 민주세력간의 총단결을 주요 골자로 삼았다. 이와 같이 함석헌이 평소 믿던 비폭력원칙이 준정치단체의 행동방침에도 적용된 예가 위와 같은 민협의 경우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그의 노익장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전국 공개강연, 공중집회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85년 인천사태 이후 재야는 크게 급진파와 온건파 양극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함석헌은 점차 급진파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했다. 어떤 급진파에선 전두환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길로서 폭력과 테러를 바탕으로 한 사회혁명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비록 함석헌은 독재정권에 반대해 민주정부를 수립하고자 활동했지만, 그는 동시에 어떤 종류의 폭력행사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급진파와 함석헌의 갈등은 불가피 해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1988년 서울평화올림픽 위원장의 자리를 수락하고 평화대회에 참석한 함석헌의 행위는 그와 절친한 안병무로 부터도 "거짓 평화주의자인 노태우 정권에 이용당하는 행동"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평화는 '절대명령' 이었고, 그에게 노태우 정권보다 큰 가치는 대한민국 민족이었고, 대한민국 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세계평화였다. 1980년 모스코바 올림픽과 1984년 LA 올림픽이 절름발이 올림픽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함석헌이 왜 그렇게 비폭력을 바탕으로 한 평화를 중요시 했나 짐작할 만하다.
함석헌 비폭력사상의 뿌리는 모든 생명전체에 대한 사랑함석헌 비폭력사상의 뿌리는 모든 생명전체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는 각 사람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앗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씨앗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형의 사회는 약자가 보호받고 강자로부터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사회였다.
비록 우리는 오늘도 폭력이 판치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함석헌이 추구한 이상적인 세계, 폭력 없는 세계는 인간이 영원히 추구할 가치가 아닐까? 힘이 강하고 우세한자가 선택을 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힘이 약하고 열등한자 역시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외모나 두뇌를 선택해서 태어난 인생이 어디 있는가? 그런 면에서 모든 인생, 모든 생명은 존중되어야하고 귀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함석헌이 살았던 시대는 흑백논리가 강요되던 20세기였다. 그는 좌 혹은 우, 적 혹은 동지, 기독교인 또는 비기독교인, 폭력 아니면 비폭력 등등의 끊임없는 흑백논리를 강요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세계가 좁아진 21세기는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사람, 문명과 어울려 살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다원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시대다. 나와 입장, 믿음, 문화가 다른 개인 혹은 집단과 싫든 좋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는 시대가 21세기다. 내가 귀한 만큼 남이 귀하고 내 종교, 내 민족, 내 신념, 내 의견이 소중한 만큼 남의 종교, 남의 민족, 남의 신념, 남의 의견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살았던 함석헌이 추구한 길은 흑백논리를 뛰어넘고 초월한 21세기에 필요한 다원적인 세계였다. '글쎄요'란 모호한 답변으로 그는 흑백논리를 거부한 '회색분자'로 한때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궁극적인 세계, 미래의 세계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강을 약으로 제하고 악을 선으로 다스리는 길 그것이 곧 함석헌이 보여 준 비폭력의 길이었다.
함석헌은 다가올 인류문명도 비폭력을 바탕으로 종교적, 사상적, 문화적 다원주의를 이뤄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여러 종교와 이념에 대하여 관용적인 입장을 취했던 만큼, 그는 세계와 인간의 삶은 다원적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사람 얼굴도 똑같은 것은 없지 않아요? 생명이 본래 그런 건데, 종교와 사상에서만은 왜 나와 똑같아야 된다고 하느냐 말이 야요?" 라고 그는 질문을 던진다. 이런 그에게 단지 누구만을 의한 종교나 이념은 별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각 인간 속에 내재한 하느님의 모습을 '본' 그였기에 이런 '하느님' 에게 고문이나 폭력이 자행되는 것을 그는 결코 용인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거부'가 그로 하여금 독재 권력의 폭력에 의해 시달리는 씨알을 위해 맨몸으로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서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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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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