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최윤실
한홍구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3·1운동의 열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민주공화제를 천명했지만 대중들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1920년대 대중들 입장에서는 누군가가 나타나서 다시 새로운 군주 국가를 세울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중들의 열망이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보천교다. 보천교의 수장인 차천자(차경석)는 다음 번 천자라는 뜻으로, 아예 국호를 시(時)라고 명명하고 자체추산 600만 명의 신도를 가지며 세를 확장하였다. 정읍에 신도시를 만들면서 지지를 받았지만 차천자의 사망과 더불어 세가 흩어지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이렇듯 역사의 변혁은 선언만으로 변하지 않는다. 대중들이 그것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고, 따라가기까지 반드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역사를 더 살펴보자면 2차 대전 이후에 독립한 나라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첫 번째 시민혁명이 4·19다. 전쟁이 끝나고 불과 만 7년 만에 발생한 4.19혁명은 일본 군국주의 교육이 아닌 한글로 학습을 한 학생들이 주도한 것으로 민주주의가 집약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는 대중들의 민주 역량을 강화시키며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로 민주주의를 지평을 넓혔다. 한홍구 교수는 한국은 짧은 기간 동안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잃은 것과 이룬 것이 무엇인지 분석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홍구 교수는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물리적인 폭력 없이 촛불만으로 정권을 교체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며 대단한 의미를 가진다고 전했다. 촛불 이후, 중요한 과제는 어떤 민주주의를 세울 것인가인데, 다양한 계층의 스펙트럼을 받아들이고 노동이 설자리가 확실한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30년 후, 50년 후에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촛불의 미래이며 민주주의의 역량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