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강정순 할머니가 가족과 찍은 사진을 들고 있다.? 강 할머니는 밝게 웃어보였지만 때때로 그리운 가족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훔치시기도 했다.
박명훈
- 1942년도에 사할린에 들어가셨다고 했는데 그 이전엔 어디에 계셨는지?"전라남도 순천이 고향인데. 아버지는 일본 큐슈 탄광에서 일하고. 어머니가 마음이 아프게 되고 일 못하게 되니까. 아버지 초청 받고 일본 들어갔지. 일본 들어가니까. 집은 대강 지어가지고는 한 집에 방 하나 딱 주면서 4명이서 살라고. 온 식구가 요 하나 깔고 같이 잤어요. (일본으로) 들어가니까 아버지가 또 오빠랑 큐슈로 징용되어버리고. 그다음에 전쟁 나니까. 아버지와 오빠는 사할린에 오지 못하고. 일본 사람들이 자기나라 가라니까 한국으로 나오시고. 그런데 그땐 소식이 없었죠. 길이 막혔으니까. 사할린 사람들은 불바다 됐으니까 다 죽었다고 소문나서. 우리 아버지는 한국(전라남도 순천) 오셔가지고 다른 여자 데리고 살고. 오빠는 우리가 다 죽었다니까 자살해 버리고."
– 구소련 정부는 한동안 일본인학교를 조선학교로 전환시키는 등 한동안 동포들의 민족교육을 인정했는데요. 교육상황이 어땠나요?"조선학교 열었는데. 조선글 배워야지 러시아글 배워야지 하니까. 조선글은 한국 못 가니까 배워서 쓸 데 없다 그러니까 러시아글만 배운 거야. 지금 거기 있는 애들은 글도 모르고 한국말 잘 못해요. 그냥 그대로 (조선학교를) 놔뒀으면 되는 건데 없애버려서. 아들이랑은 조금 배웠으니까 하지만. 다른 애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 할머니의 학생시절은 어땠나요?"한국 있을 땐 학교 마당에도 못 가봤지. 그 동네 구장인지 하는 사람들 보면 얼마나 부러웠어요. 돈 있어야 가지? 야학이라고 조금 열었다가 닫아버리면 못 가고. (1942년도에) 사할린 왔으니까 일본학교 가야하는데 9월 달에 오니까 많이 늦었죠. 8살에 가야 되는데. 늦게 들어가서 일본학교 들어가서 일본말 조금 배우고. 러시아 사람들 오니까 늦었지. 결혼 하고 나니까 아이들 보니까 학교도 못 가고 야학도 못 가고. 자기 이름자나 쓰고 배운 것도 유식한 말은 못 하고. 보통 때 쓰는 말 약간 배웠고 그렇게 말하죠. 저는 한국말 많이 하지만. 러시아말, 일본말 잘 못해요. 짧아요."
– 사할린에서의 생활은?"일도 하고 월급도 받고 그러니까 살기 좋아졌어요. 한국사람들은 부지런하잖아요. 땅을 파서 감자 같은 것도 심고. 자기 땅이 없고 그 땐 (소련이) 공산주의니까 국가 땅이니까. 뭐 좀 심어서 팔러 나가면 러시아사람들이 참 좋아해요. 사 먹는 거 좋아해요. 조금씩 팔아서 돈 가지고 사먹고. 인종차별은 어느 나라나 다 있잖아요? 북한에서 사할린으로 와서 선전 한다고. 가고 싶으면 북한으로 가고 들어오고 싶으면 사할린으로 들어와도 괜찮고. 마음대로 하라니까 동생이나 청년들이 좋다고 다 북한으로 나갔잖아요. 해방 후에 그렇지 뭐. 북한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건설한다고 일만 잔뜩 시키고. 내가 71년도 북한에 갔다 왔어요. 동생이 북한에 나가있으니까 10년 만에. 선전하느라고 잘 해줬지 뭐. 좋은 호텔에서 재워주고 하니. 동생은 김책공대 나왔어요."
– 환경이 무척이나 다른 사할린, 한국 등에서 거주하셨는데요. 고향이란 말을 들으시면 마음이 복잡하실 것 같습니다. 조상의 고향은 한국의 전라남도 순천이지만, 사할린에서 오랫동안 거주해 오셨으니까요. 본인이 가장 가깝다고 여기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면 어디일까요?"사할린이라고 반대 못하지.(할 수도 있죠) 거기서도 60년 넘게 살았으니까. 지금도 러시아 보면. 러시아 사람들이 인정 있어요. 거기는 버스 타도 노인들, 아녀자들이 짐 들고 타면 꼭 자리 비켜줘요. 내가 북한 남동생집 갔을 때 조그마한 버스밖에 없었어요. 한 여자가 (짐) 이고 아기 업고 버스 타는데. 사할린 같으면 남자들이 자리 비켜주는데 여기는 안 비켜주고. 전 얼마나 고향이 그립던지. 우린 다른 나라 사람이니까 언제 쫓겨날지 몰라서 그리웠었는데. 1991년도 7월에 관광 나오니까 우리 한국이 이렇게 잘 사는지 몰랐다. 들어와 보니까 내가 5월 달이니까 꽃이 만발하지 얼마나 좋던지. 우리 고향에 큰할머니가 살아 계시니까 한 달 동안 갔다 왔지."
– 사할린에서는 명절나기 등을 하면서 우리네 전통문화를 이어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사할린에 거주하셨는데 특히 어떤 문화가 기억에 남으세요? "거기선 양력 많이 쇠요. 음력보단 양력 많이 쇠요. 음력 쇠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지금은 괜찮게 사니까 두부도 하고 묵도 하고 빵도 하고 별 거 다하고. 손님들 해 주시고. 손님들한테 접대하고 지금은 많이 살기 좋아졌어 사할린도. 어려웠을 때는 없으니까 할 생각도 안하고. 엿도 달여 먹고 조금 살기 좋아지니까. 오늘은 이 집에서 내일은 저 집에서. 김치도 하고 장도 담그고 한국 사람들 다 해먹었어요. 한국음식 안 먹으면 못살잖아. 러시아 사람들도 한국 아줌마들이 내다파니까 맛을 들여서. 김치, 가자미식해, 고사리나물, 당근채도 잘 사먹고. 무섭다고 하더니 지금은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잘 먹어요.
사할린에선 눈이 왔다 하면. 문을 바깥으로 내지 안 그러면 못 나가니까. 나올 때면 구멍 내 가지고 다니고. 가지러 못 나가니까 미리 안으로 가져다 놓고. 사할린처럼 눈 많은 나라(지역)도 없어요. 눈싸움은 명절 돌아오면 애들은 하지요. 학교에서 하고. 어른들은 그런 거 안 하지. 자빠지기는 얼마나 자빠져요 미끄러워서. 저도 넘어져서 허리 나갔잖아요. 넘어지고 가다가 또 넘어지고. (내가) 조그마니까 바람이 불면 넘어지고. 바람이 불면 앉았다가 안 불 때면 걸어가고 그렇게 살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