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잠수정거제 포로소용소 전시관 사진
허영진
아빠에게는 북한에 대한 2가지 강렬한 기억이 있단다. 첫 번째는 아빠가 군대에 있을 때였어. 이등병에서 막 일병이 되던 때쯤이었던 것 같구나. 더웠던 여름이었는데, 부대에 비상이 걸리고 실탄이 지급되기 시작했어. 강릉으로 무장공비가 넘어왔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지.
사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이제 무장공비라는 표현은 꽤 사용되지 않은 지 제법 된 터라, 그 사실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어. 하지만 잡지 못한 공비들에 의해서 죽은 군인들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어. 결국 열 명이 넘는 공비가 사살되었지만, 끝내 한 사람을 잡지 못했어.
반대로 우리나라 군인들도 십 수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쳤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실탄을 받고 매복작전에 투입되었던 첫날의 두려움이 아직도 기억이 나는구나. 평소에 그렇게 용기 있어 보이던 고참들도 모두 약간의 공포에 떨고 있었지. 고참이라고 해봐야 지금 돌이켜 보면 스물 두어 살 되는 청년들이었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끝내 잡지 못한 한 사람 때문에 매복작전에 지루하게 이어졌고, 시간이 흐르니 그 상황에 익숙해지면서 여유가 생겼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도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면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단다.
두 번째는 제대한 아빠가 한 방송국의 다큐멘터리에 우연히 출연했던 경험이란다. 중국으로 가서 두만강과 압록강 접경지대를 돌아보면서 2000년 밀레니엄을 맞는 북한과의 관계를 대학생의 시선으로 보는 기획 프로그램이지.
중국에 맞닿은 북한의 국경에 다다르기 직전 아빠도 모르게 휴전선 너머로 들리던 방송과 우리 쪽을 향한 대포, 그리고 서로 무표정으로 서서 아빠 쪽을 바라보던 북한 군인들 같은 풍경이 떠올랐지. 그런데 막상 코디네이터는 청계천보다 조금 넓은 냇가처럼 생긴 물을 가리키며 두만강이라고 하더구나. 휴전선도 없고, 심지어 그 물가에서 빨래하는 북한 아주머니도 보였지. 평화로운 풍경이었어.
지금은 경계병이나 철조망 같은 게 많이 쳐졌다고 하는데, 어떻게 북한 사람들이 탈북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지(아빠도 쉽게 건널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렇게 아빠는 또 다른 북한을 보았던 것 같아.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북한에 대해서 다른 계기로 생각하게 되었지.
내 아이가 15년 후에도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아빠는 걱정하는 동료들에게 '익숙한 상황이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둘 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북한과 우리 둘 다 알기에 최악의 상황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며 괜찮다고 말해주었어. 그건 어찌 보면 한반도에 태어난 자의 숙명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숙명에는 스무 살 청춘의 2년이 넘는 시간을 군 복무라는 이름으로 나라에 봉사하는 것도 있을 테고, 더 크게는 네 아이들이 살아갈 이 땅에 더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어른으로서 기여해야 하는 부분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