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선전전에는 늘 민청련 회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위) 1987년 12월 대선 여의도 유세장에서 민청련에서 제작한 책자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를 판매하는 이명식 민청련 회원 (아래) 1987년 12월 대선 여의도 유세장에서 민통련 신문 ‘민중의 소리’를 나눠주는 김지나 민청련 회원
민청련동지회
이때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또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있었다. 2월 8일, 그동안 미국에 머물고 있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귀국한 것이다. 미국 정치인 및 기자들과 함께 귀국한 김대중은 공항에서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삼엄한 경비에 의해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이송되어 자택에 연금되었다.
대중들과의 접촉이 금지되었지만 김대중이 몰고 온 '민주화 바람'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민추협은 양 김씨가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미국에 있어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고문의 직책이었고, 김영삼 공동의장과 김상현 공동의장대행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김대중이 귀국함으로서 명실상부한 양 김씨 공동의장 체제가 될 것이었다. 이는 많은 국민들에게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고 며칠 뒤 있을 총선에서 신민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었다.
신민당 돌풍당시 선거구 중 관심을 끄는 또 한 곳은 서울 성북구였다. 이곳에는 민정당 김정례, 민한당 조윤형에 신민당 이철이 출마했다. 김정례는 여성계의 대표적인 이물로 장관을 겸하고 있었고, 조윤형은 해방정국과 자유당 정권 때의 정치 거물 조병옥의 아들로 민한당의 중진이었다. 이에 맞서는 이철은 1974년 서울대학교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의 주역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학생운동 1세대였다.
이철은 지역구 유권자들에겐 낯선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것인가 고심하던 중 선거 포스터 문구를 "돌아온 정치 사형수"로 했다. 마치 할리우드 서부영화 제목을 연상시키는 문구였다. 이 문구에 의해 이철에게는 신민당이라는 참신한 정당 소속에 정권으로부터 핍박당한 의로운 투사의 이미지가 유권자들에게 각인되었다. 그것은 전두환 폭압 정치 아래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던 유권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저항의 불씨를 자극했다.
선거 결과는 한마디로 파격이었다. 이민우는 정대철을, 이철은 조윤형을 꺾었다. 이는 유권자들이 민한당을 버리고 신민당을 선택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태였다. 서울 전체를 보면, 14개 지역구에서 신민당은 전원 당선됐다. 반면 민한당은 강남구 단 1곳에서만 당선됐다. 강남구에서는 민정당이 낙선하고 신민당과 민한당이 동반 당선되었던 것이다. 신민당은 서울에서 득표율이 민정당보다 15% 더 많았다.
불공정한 선거제도 덕분에 민정당이 압도적인 1당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득표율로 보면 민정당은 35.2% 신민당은 29.3% 민한당은 19.7% 국민당은 9.2%였다. 정통 야당이라고 할 수 있는 신민·민한 두 야당의 득표율이 집권 여당보다 14% 앞섰다. 내용으로는 민정당의 패배였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1980년대 중반 한국 정치의 기반을 뒤흔드는 거대한 지각변동이었다. 그 지각변동의 첫 파도는 민한당 의원들이 줄줄이 탈당하여 신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일이었다. 민한당은 결국 단 3명이 남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그나마 다음 13대 총선에서는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해 정당등록이 취소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