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트라우마는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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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당한 폭행을 생생히 기억한다. 인적 드문 강변 공원에서 세 명의 친구들과 놀고 있었는데, 30대쯤 되는 남자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처음에는 그가 길을 묻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가와 우리를 한 줄로 세우더니 다짜고짜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중학생치고는 나와 친구들도 체격이 큰 편이었으나, 씨름선수 같은 그의 몸집에는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왼손에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 주먹 곱절쯤 되는 크기였다. 사내는 우리를 때리면서 계속 혼잣말을 했다. 그가 다시 내게 와서 얼굴을 후려칠 때, 그의 입가에서 엷은 술 냄새가 풍겼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두자면, 내가 별로 곱게 자란 소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급우들과 주먹다짐도 여러 차례 했고(주로 얻어맞았다), 교실에서는 선생님들이 몽둥이나 손, 발로 내려 주시던 '사랑의 매'에 주기적으로 멍이 들기도 했다.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탓에, 선생님들이 나를 특별히 더 '사랑'해 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과거 '구타의 추억' 대부분이 잊히거나 무뎌지지만, 그날 강변에서 당한 폭행은 오늘 아침에 일어난 듯 생생하다. 뇌가 당시의 기억을 끝없이 반추해 온 탓이다. 그때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방송'될 때마다, 그 어이없는 폭력을 피하지 못했다는 자책도 따라붙었다.
"왜 가만히 서서 맞기만 했을까?" 얼굴의 상처가 아물고, 성인이 된 다음에도 이 질문은 계속되었다. 혼자도 아니고 '다 큰'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무기력하게 폭행을 당했다는 수치와 자괴감이 나를 괴롭혔다.
당시 도망칠 생각도 했었다. '내 다음 순서'가 돌아오자마자 사내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얘들아 뛰어!'하고 외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가 거머쥐고 있던 회색 돌이 눈에 들어왔다.
'도망치다 누군가 잡히기라도 하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 이상 맞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얌전히 서서 폭행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온순한 양이 되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최근 내 경험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의 한 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기억력이 좋아서 과거의 사건을 자세히 기억했던 게 아니라, 정신적 충격이 뇌에 영구적 '불도장(burn-in)'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것은 그나마 가벼운 증상이었다. 성폭행 생존자들은 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겪는다. 2015년 <워싱턴포스트>에 "왜 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저항하거나 소리치지 않는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하버드 의과대의 정신의학자인 제임스 하퍼가 쓴 칼럼이었다.
생각해 보자. 왜 많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저항하지 않을까? 하퍼 박사가 말한 성폭력 상황은 폭행이나 협박이 수반되는 경우만을 말하지 않는다. 한국 법원 같으면 '반항을 억압하거나 곤란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강간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올 법한 상황이다.
이 질문에 '암묵적으로 동의했으니까'나, 심지어 '싫지 않았으니까' 따위의 답변을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신의학 박사인 하퍼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성폭행 상황에서 피해자는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항거'를 강간 판단의 기준으로 사용해 온 한국의 법 논리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말해준다.
잘 알려져 있듯, 뇌는 영역마다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예컨대 대뇌의 전두엽은 논리적 사고와 판단을 담당하고, 두정엽은 신체기관에 운동 명령을 내리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공포신경회로가 뇌를 지배하게 되면 전두엽이 마비되어 전략적 사고를 할 수 없게 된다.
고속도로에서 사슴을 만나본 사람은 쉽게 이해할 것이다. 빠른 속도로 달려 오는 차 앞에서 사슴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한다. 이때 차가 멈추지 않으면 사슴은 그대로 차에 받히고 만다.
나도 같은 이유로 차를 급정거한 일이 있다. 사슴은 차가 멈춰선 후에도 눈만 크게 뜨고 바라볼 뿐, 달아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헤드라이트를 깜박이고 경적을 서너 번 울린 뒤에야 동물은 겨우 '부동자세'를 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범죄의 생존자들 역시 당시 상황을 흔히 '머리속이 하얘졌다'라거나 '얼어붙었다'고 표현한다. '헤드라이트 앞의 사슴' 현상이 사람에게도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과 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동물은 위험에서 벗어나면 곧 두뇌와 신체 기능이 정상으로 되돌아가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사람의 트라우마는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