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C지회 파업 집회에 참여한 이미옥 조합원(왼쪽)
KEC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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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다닌 회사가 내민 '301억 원 손배소장')
저는 경북 구미에 위치한 KEC라는 반도체제조회사의 재고관리 부서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입니다. 입사한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되었지만, 지금 제 월급봉투에 찍혀있는 금액은 최저생계비 수준에 못 미칩니다. 30년 근속수당을 바라는 건 고사하고, 야근을 해도, 명절이 되어도, 14개월째 통장에 찍히는 금액이 같습니다. 최저임금을 넘어선 금액은 회사가 도로 '압류'해갑니다. 지난 2010년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받은 게 2016년 9월부터 법원 조정 결정이 되어 '임금압류' 중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KEC지회 조합원들을 대표해 법원조정에 참여한 노조 임원 중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매달 조합원들에 대한 임금압류가 진행될 때마다, 조합원들을 볼 때마다 가슴에 돌덩어리가 얹어지는 심정입니다. 내가 더 방법을 찾아봐야 했던 건 아닐까, 조정의 선택이 지금 우리 조합원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채권압류'가 찍힌 월급통장을 볼 때마다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선택지가 있었을까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우리에게 선택지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경험한 조정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30억 원의 임금압류를 피해갈 방법은 도무지 없었습니다.
2010년 회사가 청구한 301억 원의 금액은 1심이 진행되는 기간만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회사는 '퇴사하면 손해배상에서 제외시켜주겠다'는 확약서, 문자메시지, 관리자의 직접 회유 등을 계속하며,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301억 원이라는 금액을 당사자들에게 계속 상기시켰습니다. 6년 동안 꾸준히 '곧 선고된다고 한다', '3개월 후에 선고될 거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 '다 압류되면 감당할 수 있겠냐'는 등 걱정하는 척 괴롭히는 이야기를 직장에서 계속 듣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할 수 있을까요?
1심 진행 기간 동안 청구금액에 대한 '감정'으로 2010년 301억 원이 2014년 156억 원으로, 다시 2016년에는 70억 원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터무니없는 금액이 청구된 것이 분명한데, 줄어든 금액조차도 감당하기 벅찬 금액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합원 수는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700여 명에서 300여 명으로, 다시 150여 명으로 줄어드는 것을 보며 손배가압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손배가압류에 대한 위협이 일상이 된 6년을 보내고 나니 법원에서 조정절차를 결정했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과, 30억 원이라는 금액, 매달 임금압류라는 방법까지 거론되면서 손배가압류가 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30억이라는 손배조정이 진행되는 과정은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임원들은 매일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조합원들을 위해 조정을 해야 한다, 또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의견충돌이 오갔습니다. 회의마다 눈물로 보내야 했습니다. 세 자녀를 둔 아빠 조합원의 모습이, 아들을 혼자 키우는 싱글 맘인 조합원의 모습이, 매달 받는 월급으로 아픈 부모님의 병원비를 내야 하는 조합원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몇 날을 고민했지만, 조정 결정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법원에서는 30억 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보다 더 큰 금액을 선고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쌍용자동차지부와 같이 1심 선고가 나면 가압류가 바로 집행될 수도 있어 선고가 나면 다음 재판이 끝나는 기간까지 조합원들이 가압류로 인해 얻을 경제적 고통도 염두에 두어야 했습니다. 항소하려고 해도 수천만 원의 인지대를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1심이 조정에 회부되기까지 7년이 걸렸는데, 2심은 얼마나 더 오래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6년 동안 반의반으로 줄어든 노조가 2심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은 얼마나 더 많은 회사의 회유와 협박을 감당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에게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노조를 지키려면 조정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매달 9일, 급여봉투에 적힌 'KEC채권압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