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모 등이 주축이 된 새누리당, 대한애국당 당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 연장 결정이 임박한 10월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인근에서 박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
이희훈
토마스쿤(Thomas Kuhn)의 과학철학은 반증사례에 직면해서도 지배적 패러다임을 포기하지 않는 정상 과학적 활동의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과학적 합리성 개념에 혁명적 변화를가져왔다.쿤 이전의 전통적인 논리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 과학철학이나 칼포퍼(Karl Popper)의 과학철학에서 과학자는 탐구의 대상으로부터도, 그를 예측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구축한 이론으로부터도 어느 정도의 심리적 거리를 둔 무심하고 냉정한 3인칭적관찰자로 그려진다. 과학자란 경험적데이터에 근거하여 과학이론에 가설연역적규칙나 반증주의적 규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이들이다. 이러한 과학관에서 과학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컴퓨터와 같은 기계에 가깝다.
물론 전통적 과학철학자들도 과학활동에서 과학자의 영감, 창의성, 천재성과 같은 것들의역할을 부정하진 않는다. 이 지점에서 그들은 과학자의 활동에서 과학적발견이 이루어지는 '발견의 맥락(context of discovery)'과 관찰 데이터에 근거하여 과학이론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정당화의맥락(context of justification)'을 구분할 것을 요구한다.
전통적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적 발견이 이루어지는 발견의 맥락에서 과학자개인의 창의성이나 천재성이 빛을 발한다는 사실은 아무런 이견없이 인정한다. 그러나 예술이나 문학과같은 과학이외의 영역에서도 개인의 창의성이나 천재성은 요구된다.
그런 개인적 능력은 비록 과학활동에 필수적이긴 하지만,인류의 가장 탁월한 성취라할 수있는 과학 활동의 본성을 포착하진 못한다고 그들은 본다. 이 대목에서 전통적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이 인류의 다른 어떤 활동보다 성공적인 이유는, 과학이 과거의 과학적 성과에 기반하여 누적적으로 진보하는 이유는, 과학이 근대이후 객관성과 합리성의 정수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발견의맥 락이 아닌 정당화의 맥락에 있다고 천명한다.
그런데 그 정당화의 맥락에서 핵심은 과학자가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꼭꼭 숨기고 과학의규칙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에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아무런 감정도 애착도 염원도 없이 무심하고 냉정하고 불편부당하게 과학의 알고리즘을 따라 정당화의 맥락에 임하는 과학자, 그런 과학자의 모습이 과학적 합리성의 요체이고, 그런 과학자의 활동 덕분에 과학의 축적적 진보가, 나아가 인류의 진보가 가능했다고 전통적 과학철학자들은 역설한다. 한마디로 과학의 진보는 과학계의 벌컨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과학관은 1960년대이후 토마스쿤을 위시한 임레라카토스(ImreLakatos), 폴파이아벤트(Paul Feyerabend)와 같은 역사적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정치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의 세계에서도 벌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역사적 자료를 통해 입증했다.
오직 성공의 스토리만을 담고 있는 과학 교과서가 보여주는 과학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숨쉬는 과학에서 과학자는 자신의 과학적 신념으로부터 객관성의 거리를 지키는 무심하고 냉정한 벌컨이 아니었다. 그들은 1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자신의 과학적 신념을 돌보고 보살피면서 동시에 그러한 돌봄과 보살핌이 합리적인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숙고하고 고민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자였다.
이처럼 쿤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과학철학자들은 기존의 무심하고 불편부당한 벌컨의 과학자상을 대체하는 새로운 과학자상을 정립하였고, 그 과정에서 과학적신념을 1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돌보고 보살피는 행위의 합리성 개념을 도입하였다. 적어도 그들의과학 철학에 대한 나의 해석은 그렇다.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과학 철학자들의 논의는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정치이론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학의 영역에서 벌컨이 불가능하다면 정치의 영역에서 벌컨을 찾는 것은 연목구어와 다름아니다. 아울러 쿤과 라카토스 등의 역사적 과학철학자들이 발전시킨합리성은 우리가 1인청적, 주관적, 실천가적관점에서 무엇인가를 돌보고 보살피는 행위의합리성이라는 점에서 벌컨을 대체할 새로운 민주적시민에게 요구되는 합리성, 즉 1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돌보고 보살피는 행위의 합리성과 크게 다르지않다.
한층 중요한 논점은 기존의 (3인칭적 관찰자 혹은 방관자의)합리성 기준에 따라 불합리한시민으로 낙인 찍혔던 이들중 일부가 1인칭적,주관적,실천가적 합리성의 기준에 따라 합리적시민으로 재평가될 가능성이 열린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전글에서 문재인에대한 문빠의지지는 쿤의 과학철학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전략적지지로 규정한 바 있다.
다음글에서 자세히 논구하겠지만, 그 규정이 유효한한 그들은 1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합리성의 기준에 따라 합리적 시민으로 재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그들중 일부의 다소 공격적인 모습이 우려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이는 3인칭적, 객관적, 관찰자적 합리성의 기준에서 뿐만 아니라 1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합리성의 기준에서도 비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박사모와 뚜렷한 대비를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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