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보은유족회 회장이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 소위원회실 앞에서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법 개정안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김성욱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내내 446호 앞에 서있던 안 사무국장은 가끔 화장실에 가기 위해 나온 의원들에게 말없이 다가가 눈을 맞췄다. 박 회장은 복도 구석에 비치된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논의 결과를 기다렸다.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내용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회의실 문에 귀를 갖다 대기도 했다. 다음은 과거사정리법의 소위원회 통과를 힘겹게 기다리던 이들의 9시간 풍경이다.
[오전 9시께] 안 사무국장과 유족들 국회에 도착. 국회 측의 방문증 신청 불허로 유족 30여 명은 방문자 접수실에서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박용현 회장과 김하종 회장만이 국회에 들어갈 수 있었고, 나머지 유족들은 국회 주변을 맴돌거나 추운 날씨에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오전 10시 10분께] 안 사무국장과 유족을 대표한 박용현 회장, 김하종 회장이 국회 본관 행안위 소회의실 446호 앞에 섰다. 회의장에 도착하는 의원들에게 인사하며 개정안 통과 촉구 서한을 전달했다. 박 회장은 "눈도장이라도 찍고 혹여나 논의가 안 되면 미안한 마음이라도 들게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소속 의원들도 이들의 요구에 "예, 알겠다"며 대개 긍정적인 답을 전했다. '행안위 행정 및 인사법 심사 소위원회' 소속 의원은 권은희 국민의당 의원(소위원장), 김영진·소병훈·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유민봉·이명수·홍철호·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이다. 장제원 의원은 회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음은 이들이 의원들에게 전달한 서한 내용.
"존경하는 의원님, 우리들은 한국전쟁 당시 억울하게 부모와 형제를 잃은 한국전쟁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입니다. 우리는 67년 동안 허망하게 피붙이를 잃은 채 어디 하소연 할 길 없는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천신만고 끝에 2005년 12월에 진실화해위원회가 문을 열었을 때 우리는 긴 세월 묻혀왔던 일들이 이제는 제대로 되겠다는 큰 안도와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불과 5년을 조사하고 2010년 허망하게 진실화해위원회는 문을 닫았습니다. 이후 7년 동안 수많은 미신청 유족들이 국회를 상대로 진상규명을 요구했습니다.지난 19대 국회에서도 진실화해기본법 개정안이 수차례 발의가 되었지만, 그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억울한 사람도 많고 의원님께서 살펴야 할 수많은 법들이 있겠지만, 80세를 전후한 우리 유족들이 또 얼마나 긴 세월을 기다려야 할지, 그때까지 우리 유족들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합니다.존경하는 의원님, 이번만큼은 반드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67년 동안 멈추지 않는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 일동.""간절함 때문이죠"[오전 10시 50분께] 권은희 의원 왈 "성원이 되었으므로..." 소위원회가 시작됐다. 회의가 비공개로 진행되면서 446호 문이 닫혔다. 안 사무국장은 곧장 본관 1층 방문자 접수실 쪽으로 내려가 아직 남아있는 유족들에게 서한을 잘 전달했음을 알렸다.
[오후 1시 40분께] 안 사무국장은 점심 식사 후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잠시 커피를 마시며 오후 소위원회를 기다렸다. 이때도 지난 회의 속기록을 들춰보며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는 초조하지만 법안 통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옆에 있던 임영순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사무처장은 이렇게 말했다.
"간절함이죠. 어째든 유족분들도 그렇고 오늘 어떻게든 끝장을 봤으면 좋겠다는 건데.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쉽지 않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문을 두드리는 거지요."[오후 3시께] 법안 처리 속도를 고려하면 아직 순서가 넉넉히 남았지만 박용현 회장은 오후 회의가 속개되자 다시 446호 앞에 섰다. 하염없이 기다리던 박 회장은 한국전쟁 당시 충북 보은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로 아버지를 잃었다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내가 1946년생인데, 우리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집단학살로 희생됐죠. 1950년 7월 10일이니까 서른 여덟에 돌아가셨거든. 어슴프레 얼굴이 생각날까 말까 하는 정도인데. 전쟁 나고 피란 갔다 오니까 우리 고향 충북 보은 길상리에 있는, 속리산 가는 골짜기에서 집단 학살을 당한 거예요. 인공군이 점령한 동안 부역했다는 식으로 그냥 모조리 다... 우리 어머니하고 동네 어르신들하고 같이 공동묘지에 가서 금이빨 갖고 시신을 찾아서 모셨어요.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아직도. 전쟁 때 경찰들이 남편 죽여놓고 젊은 아녀자를 빼앗기도 하고, 결국 그렇게 애까지 낳는 경우도 있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전에 태어난 자식이 있다면 자기 아버지 죽인 놈이 자기 어머니와 애를 낳았다는 거예요. 이런 일들이 아주 수두룩해요. 근데도 진실·화해위원회가 끝나버렸으니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 아닙니까..."그의 눈가에 눈물이 잠깐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