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
전쟁기념관
- 1949년 경주 내남면 명계리 이장 김원도와 그의 친가족 30여명이 경찰관 이홍열, 대한청년단장 겸 민보단장 이협우 등 10여명에게 총살당한 황당한 사건에 대해 설명하면?
"역사의 도시, 신라 천년의 수도이자 유적의 도시 경주 외곽에 가면 일가친척 30여명이 한 순간에 몰살당한 장소가 있다. 내남면 명계리 이장 김원도와 그의 친척 4가구 22명과 손씨 가족 8명 등 모두 30명이 이들에 걸쳐 경찰관 이홍열, 대한청년단장 겸 민보단장 이협우 등 10여명에게 총살당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6.25전쟁도 일어나기 전인 1949년 7월 30일~8월 1일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기가 막힌다. 1947년경 이 마을로 이사를 온 박세현이라는 사람이 1948년경 손씨네 벼 다섯 가마를 훔쳤다가 이장 김원도에게 발각되어 마을을 떠날 것을 종용받고 악감정을 품게 된다. 그 뒤 박세현의 친동생 박도환이 이협우가 이끄는 민보단에 가입하면서 이장 김원도 집안 4가구 22명과 손씨 가족 8명 등 모두 30여명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것이다.
이 사건의 주범인 이협우는 다른 곳에서도 학살을 자행해 모두 98명을 학살한 혐의로 4.19 직후에 검찰에 고소되었다. 이협우는 이 사건으로 장면 정권 시기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5.16쿠데타 후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5.16쿠데타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반면에 4.19 후 시신을 발굴, 수습하고 경주지구 양민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해 활동한 김하종은 5.16 직후 구속되어 7년을 선고받았다. 학살자 이협우가 이승만 정권 아래서 2대, 3대, 4대 국회의원으로서 떵떵거리며 사는 동안 유족들은 숨죽이며 살았고, 4.19혁명을 맞아 가까스로 진상규명을 위해 나섰으나 5.16으로 다시 숨죽이며 죄인처럼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 그동안 1946년 일어난 '10월 항쟁'을 두고는 대구폭동, 10.1소요 등으로 지칭해왔다. 미군정의 경우는 '소요'로, 보수는 '폭동'으로, 또 진보는 '항쟁'으로 표현해왔다. 저자는 '10월 항쟁'을 어떻게 보는가? 또 왜 그렇게 보는가?"이 사건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저명한 한국 현대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보는 것처럼 농민만이 주체였던 것도 아니고, 자연발생적인 측면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항쟁에는 농민뿐만 아니라 노동자, 학생, 지식인이 함께 참여하였다. 소수 사람들의 즉자적인 반항이 아니라 대규모 민중이 참여하는 거대한 항쟁이 가능했던 것은 일제시기의 민족해방운동과 해방직후의 인민위원회, 농민조합, 노동조합 등 변혁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10월 항쟁은 전국적인 조직성과 체계성을 지니고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경북지역의 군 차원에서는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좌파 인물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사건은 변혁운동세력의 조직성과 대중의 자연발생적 폭발력이 혼재되어 나타났으며, 인민대중의 변혁적 열망과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인민(민중)항쟁'으로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10월 인민항쟁'은 해방 직후 미군정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민중과 좌익세력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시위와 봉기 등의 저항운동으로,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되어 10월 초 경북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미군정의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등 주변지역 경찰 증원과 전술군 동원, 나아가 우익청년단의 지원 등 압도적인 물리력에 의해 대구·경북의 항쟁은 조기에 진압되었지만 그 여파는 12월까지 남한 전역에 이어졌다. 10월 항쟁이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식량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미군정의 가혹한 강제식량공출 등 정책적 실패였다. 여기에 친일경찰의 발호와 농지개혁 등 사회개혁의 지연이 근본원인으로 작용했다."
"여순사건도 근본원인은 대구 10월 항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박정희도 가담한 1948년 여순사건은 군인들의 '봉기'로 시작되었다. 왜 국가무력의 근간인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고 보나?"여순사건도 근본원인은 대구 10월 항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친일파의 발호, 농지개혁 등 사회개혁의 지연, 통일정부 대신 단독정부 수립, 식량난 등 경제정책 실패 등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미군정 대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으나 이런 잘못된 정책기조는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남한의 민중들은 이승만 정권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수주둔 14연대 군인들에게 제주도 주민들을 학살하기 위해 동원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남로당 조직원이 중심이 되어 동족상잔을 거부하며 봉기를 시도했고 군인들이 적극 호응했던 것이다.
군인들이 쉽게 소수의 사람들의 선동에도 동조했던 것은 여수14연대의 경우 특히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있던 경찰에 대해 반감이 컸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경찰은 친일파 일색으로 반민중적인 색채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으나 국방경비대 시절부터 군에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상층부는 박정희를 포함한 만주군과 일본군 출신이 대거 포진해 있었지만 사병들과 중하급 간부들 중에는 학병출신 등 민족의식이 있는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평소 친일경찰과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순봉기 주동자들이 친일경찰 척결을 주장하자 쉽게 동조했던 것이다. 결국 14연대 군인들은 동족학살을 거부하며 봉기해 여수를 장악하게 되었고, 여기에 남로당 등 좌익조직과 대중단체 등이 결합하면서 민중봉기,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 1948년 11월 17일부터 12월 31일까지 이승만은 한 달 보름간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이 기간 동안 제주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상되었다. 왜 이승만은 국무회의 의결까지 거친 제주도 계엄령에 대해 언론에 숨길 정도로 비밀에 부쳤다고 보나?"계엄령은 군인들도 그랬지만 민간인들에게도 제주도민을 재판절차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즉결처형해도 되는 여의봉처럼 여겨졌다. 계엄령이 선포된 동안 군경은 3,4세의 어린아이에서부터 80대에 이르는 노인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총살했고 그 때문에 희생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제주희생자 대다수가 이 시기에 학살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태로 계엄령 선포는 사실상 법적 근거가 없는 불법이었다. 그 때문에 제주도에서 토벌작전을 벌이고 있던 계엄사령관인 제9연대장 송요찬은 계엄령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정도로 한국군은 계엄령에 대해 무지했다.
계엄령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것은 미군이었다. 미군은 계엄령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계엄법이 없는 상태에서 계엄령을 내려 강경진압과 무차별적인 학살을 사실상 방조, 지원, 교사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최고 지도부 또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 군사고문단과 이승만 정권의 최고지도부는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에 의해 선포된 계엄령'이 위헌이라는 인식하고 그 책임을 현지 군사령관에게 떠넘기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계엄령 선포 사실조차 쉬쉬하며 숨겼던 것이다. 마치 현장 책임자인 사령관이 계엄령을 내린 것처럼 인식하게 한 것으로 고도의 기만책이고 책임회피다."
"역사의 단죄까지 비켜가게 놔 둘 수는 없지 않겠나?" - 지금은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아래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는데 위원회에 대한 소개와 현재 편찬위에서 하고 있는 일은?"'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한국현대사를 통해 민주국가의 기본정신과 질서를 훼손하고 인권을 파괴하는 등 반헌법적 행위를 한 인물들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 민간단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지원과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현대사에서 반헌법적 행위와 같은 나쁜 짓을 저지른 인간을 단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들의 모습을 역사에 기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법적으로 처벌 가능한 인물들이야 당연히 법의 심판과 단죄를 받아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역사의 심판, 역사의 단죄까지 비켜가게 놔 둘 수는 없지 않겠나? '공자가 춘추를 저술하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는 맹자의 말처럼 역사의 엄중함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위원회는 올해 2월 16일 반헌법행위자 열전 집중검토 대상자 405인의 명단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한 바 있다.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심각한 반헌법적 행위를 저질렀다고 여겨지는 405명을 집중검토대상자로 선정해 그들의 반헌법적 행위를 집중적으로 조사, 검토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최종 확정되면 그들의 행적을 정리해 역사에 남기려는 것이다.
위원회가 집중검토 대상자를 선정한 기준은 '대한민국의 공직자 또는 공권력의 위임을 받아 일정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그 직위와 공권력을 이용하여, ▲내란·부정선거·학살·고문 및 조작·각종 인권유린 등 반헌법행위를 지시 또는 교사한 자 ▲내란·부정선거·학살·고문 및 조작·각종 인권유린 등 반헌법행위에서 주요 임무를 수행한 자 ▲내란·부정선거·학살·고문 및 조작·각종 인권유린 등 반헌법행위를 방지하거나 고발할 책임이 있으면서 이를 적극 묵인 또는 은폐한 자 ▲내란·부정선거·학살·고문 및 조작·각종 인권유린 등 반헌법행위 또는 행위자를 적극 비호한 자' 등이다. 현재 위원회에서 조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 문재인 정부는 2018년부터 2기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의 활동을 재개할 계획이다. 과거 진실위에서 일했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내년 새로운 진실위가 설립된다면 이전 진실위와 비교해 특별히 어떤 점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보는지? "이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그 분들이 구체적인 내용을 훨씬 더 잘 알고 1기 진실위의 문제점,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구체적으로 무엇 무엇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별로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를 테면 진실위의 위상이나, 조사권한, 인력, 조직, 시스템, 재단 설립 등의 문제는 어차피 국회를 중심으로 여야의 정치적 관계에 의해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것보다는 내 입장에서는 2기 진실위가 활동을 하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가해자의 신원을 밝히는 것이다. 학살과 고문·조작 등을 행한 범법자의 신원을 명확히 밝혀야만 한다. 지금으로서는 법적으로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막혀 있기 때문에 역사의 기록으로라도 정확히 남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조사과정에서 확보되고 발굴된 자료들(기록 자료와 기관의 공문서, 참고인과 가해자·피해자의 구술자료 등)이 최대한 널리 활용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국가기록원에 들어가 버리면 그걸 접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된 인원으로 줄어들 뿐 아니라 접근 과정도 매우 까다롭다. 따라서 진실위 활동의 최종결과물인 조사보고서뿐만 아니라 그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활용된 여러 자료들에 대한 접근이 가능한 넓게 확보될 수 있어야 한다."
임영태씨는 누구? |
임영태는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덕유산 자락의 시골마을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역사이야기를 듣고 그걸 바탕으로 다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걸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문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한국의 정치현실과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으나 뜻하지 않게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20대와 30대의 청년기를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관계하며 보냈고, 30대 후반에는 푸른나무 출판사에 잠시 근무했다. 출판계와 인연을 맺으면서 대중적인 인문사회 교양서 집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금까지 다수의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교양서를 펴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가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대중적인 역사·인문사회 교양서를 쓰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사)현 대사연구소 연구위원, 통일뉴스 기획위원으로 활동했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 원회(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일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공식보고서 발간 작업을 총괄하는 업무를 맡으면서 위원회의 모든 조사보고서를 읽어야 했는데, 그것이 <한국에서의 학살>을 집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지금은 한국 근현대사와 인문사회 관련서 집필 활동에 주력하는 한 편,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새로 쓴 한국 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희미한 옛 혁명의 그림자-태양이 비껴간 나라 멕시코·쿠바를 가다>,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인류이야기 현대편 1∼3>, <인류이야기 근대편 1∼3>, <거꾸로 읽는 한국사>,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북한 50년사>, <대한민국 50년사>, <1980년대 한국노동운동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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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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