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음식점의 간장 종지(자료사진)
김도균
우리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정을 느끼고, 더욱 사소한 것에서 마음을 상할 때가 있다. 특히 먹는 것과 관련된 일에서는 소소한 부분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언젠가 '간장 두 종지'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무슨 내용인가 하고 찾아 읽어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촌극이었다.
어느 메이저 신문사의 부장이 동료 3명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회사 근처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을 시켰는데, 간장 종지가 1인당 1개가 아니라 2인당 1개라는 이유로 뿔이 단단히 난 것이었다.
이러니저러니 말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말투나 태도가 불손했을 수도 있다. 일상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찮은 호박 나물에 속이 상하는 존재가 인간인지라 간장이 아니라 맹물 한 잔에도 분통을 터트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일기장에나 쓸 내용을 신문 지면에 싣겠다는 마음을 낼 정도로 분기탱천한 모양이었다. 기자 자신도 그런 내용을 쓴다는 것이 켕겼던지 '옹졸한 이유'라고 적었지만, 옹졸함을 방패막이로 내세운 다분히 악의적인 글이 분명했다. 홧김에 그만 특정 식당을 타깃으로 삼아 노승발검(怒蠅拔劍)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파리를 보고 칼을 빼 든 격인데, 총칼보다도 무섭다는 펜을 사적인 일로 휘두른 그 심사가 무섭고 표독스럽게만 느껴졌었다.
한때 나는 이름도 미미한 어느 신문사의 편집국장으로 일한 적이 있다. 월간 잡지사의 데스크를 지내기도 했다. 많은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문이고 잡지였겠지만, 그 내부의 구성원들은 무척이나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최대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려고 애썼다.
아무리 작은 언론·잡지사에서도 '게이트키핑'을 거치게 된다. 게이트 키퍼(gate keeper)는 우리말로 '문지기, 수위'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문지기처럼 단단히 지키고 서서 통과 여부를 결정하는데, 언론에서는 뉴스 결정자가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과정이 '게이트키핑'이다. 최종 결정자는 기사가 언론윤리강령에 어긋나지는 않았는지, 즉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한 부분은 없는지 등을 꼼꼼히 살핀 후 지면에 싣고 말고를 결정한다.
그런데 굴지의 언론사에서 '간장 두 종지'와 같은 의도가 불순한 칼럼이 걸러지지 않고 지면에 떡하니 실렸다는 것이 의아했었다. 걸러지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묵인한 것일까? 전자라면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고, 후자라면 막강한 언론 권력의 오만방자함이다.
누구나 알겠지만, 언론은 힘이 세고 그 힘은 무섭다. 어떤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가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거나 매장하기도 한다. 잘못된 언론 기사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본 기업은 많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은 "언론은 정책에 엄청나게 영향을 끼치면서도 정작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언론의 힘은 변덕스럽고 위험하다"라고 진단했다. 아주 정확한 지적이다. 선진국 후진국을 막론하고 언론이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균형감각을 상실할 때 심각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김수영의 '분노'가 그리운 이유사람은 저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다. 한 이불을 덮고 사는 부부도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종교가 다르고 신념이 다르고 생사관이 다르다. 세상은 다양한 개성들이 모여 이루어진 모자이크 작품에 비유할 수 있다. 장미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세상을 온통 장미꽃으로만 채웠다고 상상해 보라. 참으로 멋이 없고 그 획일성에 금방 질릴 것이다. 다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소수 의견도 사람마다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이 바로 자유민주주의 장점이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다양한 문제에 개인마다 시각차를 보인다. 관점의 차이다. 내가 오른편에 치우쳐 서 있으면 좌가 많이 보일 것이고, 왼편에 치우쳐 서 있으면 우가 많이 보일 것이다. 어떤 시각에서 대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신문도 보수와 진보 신문이 있고, 중도를 표방하는 신문도 있다. 나는 이른바 보수와 진보를 대표한다고 일컫는 두 신문을 보고 있다. 두 신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뭇 다르다. 집회 사진을 싣더라도 보수 신문은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하고, 진보 신문은 공권력의 과잉 대응 사진을 싣는다. 극과 극의 배치이다. 똑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생각하는 것이 그토록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두 신문의 골수 독자들이 서로 만나 대화를 한다면,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므로 물과 기름처럼 둥둥 떠서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 사회는 흑백논리와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언론이 서성거린다. 1988년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이 있었던 그해 김수환 추기경은 송년 인터뷰에서 "언론이 진실을 보도하면 국민은 빛 속에서 살 것이고, 언론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면 국민은 어둠 속에서 살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땅에는 권력의 '애완견'이 되기를 자처하는 언론이 적지 않다.
나는 우리 사회 병폐의 정점에 언론이 도사리고 있고, 정치에 앞서 언론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편파, 왜곡 보도를 하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결정적 허물은 못 본 척 눈을 감는다. 비리투성이의 힘센 기업이나 사람은 건들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만만한 쪽을 건들면서 법과 정의를 운운한다. 사실대로 쓰면 재미가 없어서 그런지 부풀리고 꾸며내기도 잘한다. 연예인의 스캔들 같은 사건은 대서특필하면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언론의 공정성 결여는 사회적 담론을 편향적으로 몰고 가게 된다. 그런 것이 가능하기에 정치 권력이 탐욕스럽게 농간을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짧은 칼럼 한 편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은, 글의 힘이면서 메이저 신문의 힘이다. 만약 다른 신문에 그런 칼럼이 실렸다면, 아마도 그렇게까지 인구에 회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장 두 종지'를 읽은 후 씁쓸해진 생각 속을 뚜벅뚜벅 걸어 다니는 시 한 편이 있었다.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였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X한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