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땅굴>의 한 장면"전쟁이 끝났으니 우리들도 살았다"고 말하는 나오히라의 친구. 하지만 나오히라는 진압봉을 둔, 일제의 관리를 떠올리며 전쟁이 끝났어도 핍박은 계속될 것이라며 두려움에 떤다.
테즈카 오사무
테즈카 오사무는 누구인가. 20대 중반 이상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어쩌면 모르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지만) <우주소년 아톰>(일본어 원제, 철완 아톰(鉄腕アトム))을 그린 만화역사에 길이 남을 거장이다.
아동, 어른, 소년, 소녀, 과학, 의학, SF, 에로, 스릴러, 순정, 정치, 종교, 철학 등 실로 다양한 장르를 종횡무진해 다채로운 연출을 펼친 위대한 만화가이자, 1963년에 일본과 미국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우주소년 아톰>)의 TV방영을 선보인 애니메이션 제작자로서 그의 궤적은 널리널리 뻗어나갔다.
예컨대 오사무의 연출은 후배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드래곤볼>의 토리야마 아키라(鳥山明), <도라에몽>의 후지코 후지오(ふじこエフふじお)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가에게 거대한 충격을 던졌다.
미야자키와 토리야마와 후지코의 세계는 다시 <원피스>의 오다 에이이치로(尾田栄一郎), <나루토>의 키시모토 마사시(岸本斉史), <헌터x헌터>의 토가시 요시히로(冨樫義博), <베르세르크>의 미우라 켄타로(三浦建太郎) 등 수많은 신진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사무를 기리는 '만화의 신'이라는 찬사가 전혀 아깝지 않다.
그렇다면 오사무의 <긴 땅굴>은 어떤 작품인가. 우선 제목부터 살펴보자. 오사무는 일본에서 잘 쓰이지 않는 한자 窖(움막 교)를 써 작품의 의미를 강조하려 한 것으로 짐작된다. 본래 일본어로 '아나구라'라고 읽는 窖 뒤에, '구멍'이란 뜻의 아나あな라는 표기를 일부러 덧붙인 걸 보면 그 심증은 굳어진다. 네이버국어사전에 따르면 窖는 땅광(뜰이나 집채 아래에 땅을 파서 만든 광)이란 뜻을 품고 있다. 아마 오사무는 제목을 통해 움막 같이 어둡고 긴 땅굴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제목 '긴 땅굴'은 만화 속에도 등장하는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전투기 공습을 피하기 위해 땅 속 깊이 파고들어간(나오히라를 비롯한 재일조선인들이 대거 강제 동원돼 온갖 고문과 생사를 넘나들며 파낸) 지하방공호를 암시한다. 땅굴의 입구를 강조한 표지그림은 또 어떤가. 오사무가 일본사회에서 빛이 내리쬐지 않는 지하로 계속 파고들어가 볕으로 손을 뻗을 수조차 없는 재일조선인의 암담하고 섬뜩한 처지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나오히라의 아들 히사가 일본인 고등학생들에게 '집단폭행' 당하는 장면의 펜 터치는 섬뜩하리만치 사실적이며 역동적이다. 이는 재일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낮은 지위에 있으며 조선인 차별문제가 일본에 만연해있음을 드러내려 작가가 각별히 신경을 기울여 작업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른 장면들과 펜 터치, 명암 등에서 확연히 그 차이가 두드러진다.
만화 속에는 일제강점기, 전쟁에 강제 동원돼 고문당하며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본래 조(趙)씨 성을 쓰던 자이니치 1세 모리히라 나오히라(부모)가 출생을 속이며 조선인임을 부정하는 장면, 그런 아버지에 반발해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던 중 비극으로 치닫는 자이니치 2세(딸 아사(亜沙)/아들 히사(久))의 모습, 일본에 홀로 남겨진 어머니를 먼 발 치에서나마 보기 위해 북한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으로 밀항한 청년(서영진)의 이야기, '조선인 따위에게는 폭력을 휘둘러도 괜찮다'며 재일조선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일본인사회의 분위기가 선명하게 담겨있다.
결말이 잊혀진 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