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법원의 성법죄 판결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본다.
강인규
*이전 기사('꽃뱀론'으로 성폭력을 지지하는 당신에게)에서 이어집니다. "강간죄에 있어서 폭행 또는 협박은 피해자의 항거를 불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하고…"
한국에서 강간의 기준을 마련한 2000년 대법원 판례다. 지난 세기 한국 법원의 성인식을 기록한 '사료'라 해도 민망할 이 판례는 21세기 첨단 한국에서 변함없이 '성서' 같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법원은 '항거'를 강간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본다. 다시 말해, 상대가 성관계를 원하지 않아도 저항하지 않으면 '합의에 의한 성관계'가 되는 거다. 법원의 눈에는 '합의하는 게 합의'가 아니라, '저항 안 하는 게 합의'인 셈이다.
'항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간이 인정되는 경우는 상대 의지를 좌절시킬 만큼 폭행을 당하거나 협박을 받는 상황에 한정된다. 계약으로 친다면 매우 불평등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당신에게 계약서를 내밀며 '극렬히 항거하지 않으면 동의한 걸로 알겠다'고 말한다고 해 보자.
게다가 '항거'도 법원이 인정하는 방식으로만 해야 한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항거'에서 '항(抗)'은 '가만히 있지 않다', '맞서다'라는 뜻이고, '거(抗拒)'는 '거절하다,' '거부하다,' '막아 지키다'라는 뜻이다. 결국 '항거'는 말로 거절하는 것에서부터 상대에 물리적으로 대항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 된다.
그렇다면 한국의 법원은 '싫다', 또는 '하지 말라'고 거부의사를 표한 것도 '항거'로 간주할까? 법원이 어떤 행위를 '항거'로 보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거절과 거부가 '항거' 아니라는 한국 법원2015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한 남성이 여자친구를 폭행하고 두 차례 강간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첫 번째 강간 사건에서, 피고는 성관계를 요구했고 원고는 '하지 말라'며 분명한 거절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남성은 무시하고 강압적 태도로 다가갔고, 여성이 밀쳐내는데도 불구하고 성행위를 했다.
두 번째 혐의는 협박과 폭행이 수반된 강간(강간상해)이었다. 피고는 "내가 네게 쓴 돈이 얼마냐, 미친X" 등의 욕설을 퍼붓고 나갔다가 10~20분 뒤 돌아와 성행위를 요구했다. 여성은 남자가 "욕설을 할 당시 얼굴에 담뱃불을 갖다 대려 했고, 주먹으로 벽을 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법원은 1·2심 모두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첫 번째 사건에 대해 "의사에 반할 정도의 힘을 행사해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볼 여지는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반항을 억압하거나 곤란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강간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말로 거절의사를 밝히는 것만으로는 '항거'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협박과 폭행이 수반된 두 번째 사건은 어땠을까? 1심과 항소심 모두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폭력 때문에 심리적으로 억압된 상태가 계속됐다면 피고가 돌아왔을 때 방에 들어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10~20분 사이 원고가 심리적으로 안정돼 합의 하에 성관계를 가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욕설을 하고, 벽을 치고, 담뱃불로 협박을 했어도 10~20분이 지난 뒤에 성행위가 일어났으므로 강압에 의한 성폭행이 아니었다는 논리다. 법원이 보기에는 가해자가 어떻게 행동했든, 방에 들어오도록 방치하면 '합의에 의한 성관계'가 되는 것이다.
한국 법원의 가해자 중심 시각요약하면, 법원의 '항거'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물리적으로 맞서야 하고, 그것도 꽤 완강히 맞서야 한다. 그저 '싫다'고 말하거나, 몸을 밀쳐내는 정도로는 곤란하다.
강요로 작성된 계약서에 항의해 무효소송을 한다고 해 보자. 재판부가 "의사에 반할 정도의 힘을 행사해 계약서를 작성한 것으로 볼 여지는 있다"고 전제한 뒤, "반항을 억압하거나 곤란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계약을 무효로 볼 수 없다"고 판결하면 어떨까?
여기서 한국 법원 특유의 남성적 시각이 드러난다. '저항 없으면 합의' 식의 가해자 중심 논리만이 아니다. 앞의 판결에서 보듯, 재판부는 상대 의사에 반하는 성행위를 '성관계'로 칭한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일방적으로 행하는 성행위는 '성폭행'이지 '성관계'가 아니다.
성폭행을 '성관계'로 보는 것은 가해자의 시선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것으로,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저 '폭행'일 뿐이다. '성관계(sex)'와 '성폭행'을 구분하는 이미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시각이다. 예컨대 미시건대학의 성폭력예방센터는 학생들에게 "성폭행은 폭력 행위이지 섹스가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가르친다.
'성폭행'을 '성관계'와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데, 미시건대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폭행'과 '섹스'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기를 이용한 폭력'을 '성관계'로 부르는 것은 범죄를 생존자 입장이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을 가해자 중심으로 보게 되면, 사회구성원들이 가해자의 책임을 묻기보다 피해자를 비난하게 된다."'가해자의 책임을 묻기보다 피해자를 비난하기'. 정확히 한국사회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한 나라의 법원이 그릇된 시각에서 범죄를 판단하고, 이 왜곡된 사고를 재생산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재판부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도 놀랍다. 두 번째 사건에서 판사는 물리적 위협과 폭행을 당한 여성이 불과 몇 분 만에 '심리적으로 안정돼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시각을 가진 판사가 생존자의 삶과 존엄성이 달린 사건을 판결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해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