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 설계 모형 만들기에 빠져 있는 서울안평초 학생들.
윤근혁
이 학생들이 모형을 만들고 있는 놀이터는 내년 4월까지 학교 주변에 세울 한내놀이터와 늘봄놀이터 두 곳이다. 동대문구는 5억6000만 원이 드는 이 사업에 어린이들을 디자이너로 참여시켰다. 이날 모인 17명의 학생들은 이 초등학교와 마을학교에서 공모해 뽑은 디자인 자문위원인 셈이다.
아이들은 네 모둠으로 나눠 토의를 벌였다. 그런 뒤 열심히 자신이 뛰어놀 놀이터를 설계했다. 동대문구 혁신교육지구 마을협의체 마을교사 3명과 놀이터 사업을 담당하는 사단법인 동대문다움, 서울시립대 관계자, 설계사, 동대문구청 공무원 등 모두 9명이 아이들을 도왔다.
그런데 한 모둠 설계모형에서 심상치 않은 것이 보였다. 황토색 지점토(클레이)로 만든 이 토굴모양의 모형에는 '노숙자방'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노숙자방'을 만든 한 남자 학생에게 "노숙자방을 왜 만들었어요?"라고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으로 "노숙자들은 밤에 잘 데가 없잖아요. 여기 와서 자라고…."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래서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여긴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인데?"여긴 숲속 쪽이라서 괜찮아요."
-노숙자 본적 있어요?"예. 서울역에서 본적 있어요."
어린이에게 자신들의 놀이터 설계 권한을 맡겼더니 어른들의 형편까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런 모습은 1차 디자인 캠프가 열린 지난 9월 28일에도 있었다.
기존 놀이터에 있던 어른용 운동기구에 대한 토의를 할 때였다. 상당수의 아이들은 이 기구를 바꾸자는 의견을 냈지만, 한 아이는 "그냥 두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 까닭은 "할머니들이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놔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1, 2차 디자인 캠프에서 아이들 가운데엔 '어르신 쉼터', '길양이 쉼터'도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물론 아이들은 "아이들 아지트를 만들어 달라", "그네를 더 많이 세워 달라", "미로를 만들어 달라", "놀이기구를 더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들 요청 속에서 어려운 사정을 가진 이들을 생각하는 마음도 내보인 것이다.
"마을과 학교가 아이들 주인으로 참여시켜야"김정호 대표는 "실제로 노숙자방과 같은 것을 놀이터에 구현하는 것은 어렵지만 마음 훈훈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마을교사들의 마음도 따뜻해졌다"면서 "학생들이 만든 설계모형이 최대한 새 놀이터에 적용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몸으로 느껴왔는데, 이 과정에서 '아이들의 참여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 설계도를 그린 아이들은 내년 2월에 시작하는 놀이터 공사 감수도 맡을 예정이다. 놀이터가 준공되는 날, 놀이터 생일파티로 '놀이축제'도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