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천안 독립기념관 밝은누리관에서 열린 '3.1운동을 걷다, 보다, 말하다' 토크콘서트에 참석한 시민패널 이은주 씨가 발언하고 있다.
신상미
"시민의 탄생은 언제부터였을까. 아관파천 당시 이권 침탈이 절정에 달했다. 최근에 트럼프 미 대통령이 방한해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를 보여준 것과 같은 이치다. 당시 종각역 앞에 사람들이 모여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집회다. 여기서 우리의 이권을 외국에 넘기지 말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러시아가 거문도 옆 절영도를 석탄저장고로 달라고 한 요구를 막아냈다. 이것부터 시민이 탄생한 거다." "이런 것들이 학습하고 쌓이고 터져나간 것이 3.1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1910년 일제에 강제 병합된 이후 차별정책에 대한 저항이 비밀결사, 독립운동 기지 건설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여기에 민족자결주의, 2.8 독립선언 등이 합쳐져 3.1 운동으로 연결됐다. 전 민족, 전 계층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참여해 벌어진 민족운동이자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대한독립 만세'였다. 이것이 임시정부를 탄생시켰고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출범시킨 씨앗이 됐다. 또 현재 광장의 힘으로까지 연결된 거다."
최태성 EBS 한국사 대표강사(전 대광고 교사)가 오는 2019년 3.1 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3.1 운동의 의의에 대해 이와 같이 강조했다. 최태성씨는 KBS <역사저널 그날>에 고정 패널로 출연한 바 있고, 현재 방송 출연, 대중강연 등을 통해 역사강의를 해오고 있다. 최 강사는 또 "5.18 민주화운동이 실패라는 사람도 있다"면서 "5.18이 있었기 때문에 그 씨앗이 조금씩 자라서 1987년 6월 항쟁의 에너지를 분출시킬 수 있었던 거다. 5.18이 실패한 게 아닌 것처럼 3.1 운동이 비록 잔인하게 진압됐지만, 우리가 싸울 수 있다는 자각을 심어줬다"며 실패한 혁명이 아님을 강조했다.
지난 19일 오후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천도교중앙총부가 주관,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 '3.1운동을 걷다 보다 말하다'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이날 최태성 강사를 비롯해, 박광일 역사여행전문가, 시민패널 이은주·정성윤 씨, 정재환 박사(한국사 전공)가 참여해 3.1 운동의 전개과정과 숨은 이야기, 독립운동사 인물 발굴과 지역사 재조명의 중요성 등을 토론했다.
이날 사회를 맡은 정재환 박사는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를 인용해 3.1 운동이 "전국에서 200만 명이 참여한 거국적·민족적 운동"임을 환기시켰다. 박은식은 역사학자이자 임정의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정 박사는 이어 "내가 만일 윤봉길 의사였다면 어땠을까, 처럼 내가 그 사건의 그 인물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라는 태도가 역사를 공부하는 좋은 접근법"이라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들 한다. 역사를 바로보지 않는 민족에게도 미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누구보다 우리가 먼저 물어봐야 한다"며 3.1 운동에 대한 시민의 관심을 호소했다.
3.1 운동은 일제의 압제와 한국인 차별에 저항해 일어난 최대 규모 운동이다. 3.1 운동을 두고 '혁명'이라는 용어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을 정도로 당시까지 민주주의를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던 한국인이 이룩한 성과로서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서울을 넘어 평양·광주·군산 3월 5일, 대구 3월 8일, 제주 3월 21일 등 전국으로 독립에의 열기가 퍼져나갔다. 이어 중국·일본·미국까지 확장됐다. 1919년 내내 전 세계를 향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린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박광일 역사여행전문가는 이와 관련해 70만 명에 달하는 재조 일본인들의 구술과 '집단 기억'에 대해 언급했다. 박 강사는 "시골에 살았던 민간 일본인은 다수의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살지 못한다"며 "1945년 8월 해방 기념 만세 소리를 듣고 일본인 부녀자와 아이들이 막연한 공포에 휩싸였다. '조선인들이 다시 무서워졌다'면서 만세 소리를 듣고 공포에 빠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들은 1919년에 있었던 일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며 "우리도 모르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그것이 1945년 해방이 되면서 현실화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날 3.1운동사 연구에서 서울 중심의 사건 서술에서 벗어난 '전국화'와 더 많은 인물의 '발굴' 필요성이 강조됐다. 정재환 박사는 "3.1운동하면 탑골공원, 태화관부터 생각한다. 제암리 학살까진 떠올리는데 그 아래로는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던 것 같다"며 "이번에 군산을 돌아보면서 군산이 일찌감치 3월 5일에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사실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군산 구암교회 전시관에 가서 보고 김병수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200장 갖고 내려간 것이 이 지역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는 걸 알았다"고 설명했다.
정 박사는 "앳되고 잘생긴 학생의 사진을 전시관서 처음 보고 내가 김병수 선생의 환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좌중 웃음)"고 언급하기도 했다.
김병수(1898~1951) 지사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과대학) 재학 중 3월 5일에 일어난 군산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같은날 상경해 서울 남대문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남대문에서 수백 명의 학생을 이끌고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