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시 문의면의 청남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이 같은 성과는 4개월 뒤인 2005년 3월 22일, 육군3사관학교 제40기 졸업식의 발언으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은 "우리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 및 번영을 위한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 한국의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시한 것이다.
더 이상 미국의 뒤를 따라다니지 않고,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뿐 아니라 동북아 국제관계에서도 우리 입장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미국의 꽁무니나 추종하던 지난날을 청산하자는 의미에서 '졸업식장'을 발언의 장으로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또 그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이루려면 "따질 것은 따지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겠다"라고 밝혔다. 그는 한국이 그만한 자격을 갖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강력한 군대,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경제력, 민주화 실현, 평화 지향적 역사 등을 우리의 자산으로 거론했다. 이러므로 한국이 동북아 질서를 주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게 그의 강조점이었다.
2004년 11월 3일의 LA 발언은 이렇게 2005년 3월 22일의 동북아 균형자론 주창으로 이어졌다. 핵문제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며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노무현의 도전은 한반도 정세가 극한으로 치닫지 않도록 하는 데 일정 정도 기여했다. 외세열강이 한민족의 뜻을 무시하고 이 땅에서 전쟁을 벌이지 않도록 하는 데 이바지했다.
물론 조지 부시가 마음대로 전쟁을 벌이기는 힘들었다. 이라크 문제에 묶여 있었던 당시의 미국이 한반도에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킬 여력은 없었다. 또 중국도 가만히 용인할 리 없었다. 그 외에, 미국이 한반도 전쟁에 부담을 가질 만한 심리적 요인도 있었다. 제너럴셔먼호사건(1866년), 신미양요(1871년), 한국전쟁(1950년), 푸에블로호 사건(1968년) 등에서 나타나듯, 미국은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대결 국면에서는 매번 이상하리만치 약한 모습을 보였다.
여러 요인들로 인해 조지 부시가 전쟁을 벌이기는 쉽지 않았지만, LA 발언은 전쟁을 반대한다는 한국의 입장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미국 보수파 네오콘이 대북 강경론을 확산시키지 못하도록 제동을 거는 역할을 했다.
물론 노무현의 대북·대미 입장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한계도 많았고 비판도 많았다. LA 발언의 결과물이 끝까지 살아남지도 못했다. 하지만 수도 서울에 미군을 두고 있고, 청와대 코앞의 미국대사관 및 CIA 지부를 신경 써야 했던 2004년 당시의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그만한 용기를 내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LA 발언으로 시작된 일련의 도전으로, 6자회담은 미국의 뜻대로만 움직일 수 없게 됐다. 그렇다고 북한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도 아니다. LA 발언은 동북아 정세가 한반도 평화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하는 데 역할을 했다.
뉴질랜드에서 <평양 리포트>의 공동 편집인이자 빅토리아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는 팀 빌이 지은 <북한과 미국, 대결의 역사>란 책이 있다. 이 책에서 팀 빌은 노무현의 외교적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노무현의 진보적인 행정부는 특히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기에 미국의 대북 정책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LA 발언이 미국 견제와 전쟁 방지에 도움이 됐다고 본 것이다.
자주적 외교노선을 지향한다면, 트럼프도 바뀌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