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자명 선생 평전들
류인호
아나키스트 류자명 선생우리 세 사람은 오후 1시 정각에 만나 가까운 밥집에서 마음의 점을 찍으며 류인호 선생으로부터 할아버지 류자명(柳子明) 선생의 행적을 들었다.
우근(友槿) 류자명 선생은 충청북도 충주 사람이다. 본명은 류흥식(柳興湜)이지만, 별명 '류자명'으로 더 알려져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충주 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 중심의 시위를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 탐지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고, 나석주의 소개로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비밀참모로 국내외 일본인과 친일파 처단활동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렸다(영화 <암살>에도 소개됐다).
1927년 중국 난징에서 김규식, 중국인 목광록, 인도인 간다싱 등과 함께 일본에 대한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공동투쟁을 강화할 목적으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했다. 우근은 이념적으로 무정부주의를 견지, 1927년 조선혁명자연맹 간부로 활동하며 무창 입달학원에서 강의했고, 1930년 상하이 강만의 농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장도선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1931년 무정부주의자인 류기석 등과 함께 '불멸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했다.
1936년 중국군과 협력해 전시공작대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이어 무정부주의자 훈련소인 민단훈련소의 참모 이우관 등과 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하이부를 조직해 친일파 유길명에 대한 처단을 시도했다. 1943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지냈고, 해방 이전까지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의 거물급 인사와도 교류하면서 항일독립운동에 한중 연합전선을 펴나갔다.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후난성 창사에서 대학교수 생활을 했다. 우근은 윈난 고원지대에서 최초로 특수벼 재배에 성공해 중국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근은 독립운동가 출신 원예학자로 특히 중국인들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다. 만년에는 후난농업대학 원예학과 명예주임으로, 중국 원예학회 명예이사장에 추대됐다.
나는 그분이 아나키스트로 독립운동가로만 알아왔는데, 이번 손자와 만남에서 원예 농학자(農學者)로 3천 명의 제자를 길러낸, 중국에서 대단히 이름을 떨친 국보적인 학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해방 후 1950년 6월 25일 귀국선에 오르려고 했으나, 하필이면 그날 한국전쟁이 발발해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1985년 망명지 후난성 창사에서 별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