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행위자적 관점(sub specie humanitatis)과 삼인칭적, 객관적, 이론가적, 관찰자적 관점.
pexels
철학자 토마스 네이글은 인간 내에 존재하는 두 가지 관점을 구분함으로써 전통적인 철학의 난제들, 가령 삶의 의미, (카뮈가 시찌프스의 신화로 형상화한) 철학적 부조리, 자유의지 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했다.
그 한 관점은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행위자적 관점(sub specie humanitatis)이고 다른 한 관점은 삼인칭적, 객관적, 이론가적, 관찰자적 관점(sub specie aerternitatis)이다. 일상에서 나는 대개 첫 번째 관점(일인칭적, 주관적 관점)에서 나의 생명, 건강, 직장, 가족 등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중요성과 의미를 부여하며 지극한 진지함으로 그들을 보살핀다.
하지만 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모래 위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를 유심히 관찰할 때의 시선, 그런 무심하고 냉정한 삼인칭적 관찰자 혹은 방관자의 시선으로 어떤 대상을 바라 볼 수도 있다. 과학자가 탐구의 대상을 이론가의 입장에서 관찰할 때 혹은 직업의식에 투철한 기자가 객관적이고 중립적 입장에서 정치·사회의 이슈를 보도할 때 이런 관점을 취한다.
흥미로운 점은 내가 나 자신을 삼인칭적 관찰자 혹은 방관자의 관점으로 응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때 나는 드넓은 우주, 영겁의 시간 속에 잠시 존재하다 사라지는 지극히 사소하고 우연적인 미물로 느껴지고, 아울러 내가 일인칭적, 주관적, 행위자적 관점에서 내 자신에게 부여하던, 만물의 중심으로서의 그리고 의미의 원천으로서의 중요성이 돌연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처럼 서로 충돌하는 두 가지 관점(주관적 행위자적 관점과 객관적 관찰자적 관점)이 우리 안에서 서로를 포획하고 있고,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두 관점의 충돌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덤덤하지만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조차 끔찍해 하고, 삶이 더없이 허무하다고 무의미하다고 되뇌지만 동시에 삶의 의미를 간절히 갈구하며, 왜 살아야 하는가라고 자문하지만 그에 대한 답변이 채 주어지기도 전에 이미 생을 위해 발버둥치는 자신을 발견하는, 그런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고대 철학자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곤 "나는 불사의 아들을 둔 적이 없다"고 말하며 평정심(apatheia)을 잃지 않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많은 이들은 이 일화를 듣고 어떤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되는데, 그 당혹스러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일인칭적, 주관적, 행위자적 관점을 취해야 한다는 우리의 상식과 그것을 거부하며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삼인칭적, 객관적, 방관자적 관점으로 응대하는 아낙사고라스의 모습 사이의 충돌에서 온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일인칭적, 주관적, 행위자적 관점을 취해야 한다는 상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것은 부모에게 자녀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는 아무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녀는 부모의 삶의 방향과 행불행을 결정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결정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린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들에 대하여, 특히 우리의 노력과 헌신을 통해 어렵사리 얻어진 것이라 애착이 간다면 더욱 더, 일인칭적, 주관적, 행위자적 관점을 취한다.
문재인 지지자들이 성숙한 민주 시민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