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종잇장처럼 창백한 색깔의 꽃잎을 지닌 '페이퍼 플라워'.
이철영
이쯤 되면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가 나타나 주어야 하는데, 눈을 씻고 보아도 짐승은 보이지 않는다. 박 이사에게 물었더니 '와일드 독'이라는 들개는 있는데, 눈에 띄지도 않는단다. 그러면 그렇지 사바나에 사는 하이에나가 무슨 위대한 이상 실현을 위해 먹잇감도 없는 3000m의 산을 오른단 말인가. 알고는 있었다 해도 확인되는 진실 앞에 허망하다.
6500만 년 전에 형성된 산의 피부가 풀썩 인다. 길은 온통 화산재 먼지로 가득하다. 스패치를 하지 않으면 신발 속으로 먼지가 연기처럼 스며든다.
저 멀리 마웬지봉과 키보봉이 보인다. 우리가 올라야 할 '빛나는 산'이다. 산기슭에 사는 '와차가족'의 전설에 따르면 마웬지가 키보에게 불을 빌려 파이프에 불을 붙였고 그래서 화산폭발이 일어났다고 한단다. 호롬보 산장이 가까워지자 발밑으로 운해가 보이기 시작한다.
출발한 지 총 7시간 정도 걸려 호롬보 산장에 도착했다. 신들은 구름 위에 산다. 구름은 지상과 천상을 가른다. 세속과 신성을 가른다. 우리는 점차 '응가에 응가이'(신의 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호롬보는 만다라 산장보다 훨씬 많은 등산객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가장 쉬운 마랑구 루트를 택했지만, 다른 코스로 온 이들도 이곳을 거쳐 마지막 산장인 키보에 오르는 것이다. 정상을 거쳐 온 이들이 부러웠다. 신병훈련소에서 제대를 앞둔 선임을 만난 기분이었다. 호롬보는 오르는 이들과 내려오는 이들이 만나 장터처럼 활력이 넘쳤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듯, 28명 현지 스텝들의 공연이 있었다. 공연이라고 해봐야 좁은 식당 안에서, 정성을 다해 등반성공을 비는 노래였다. 힘이 넘쳤다.
아프리카의 지난한 역사.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노동의 리듬, 그들의 한과 맥박이 전해졌다. 아니 그들이 부르고 있는 것은 진도아리랑이었다. 탄자니아에서 태어나 동아프리카 지구대를 지나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 진도 땅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 그것. 기나긴 생명의 줄이 우리를 다시 만나게 했다. 30만 년 전에 헤어진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이다. 실바노, 아우구스티노, 자파티, 라마, 윌리엄은 우리와 같은 피와 맥박을 지닌 호모사피엔스다.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