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 망명인' 조영삼(왼쪽 두번째, 뒤 사람)씨가 비정향장기수 이인모 선생(왼쪽 세번째)과 함께 1991년 무렵, 경남 김해 진영에 살다가 마산에 나들이 했을 때 부축하기도 했다.
김영만
그는 독일 국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20년간의 망명 생활을 접고 2012년 12월 31일 영구귀국을 결심하고 인천공항으로 입국했다. 하지만 한국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던 부모님조차 만나지 못했다. 북한에 가서 김일성 주석의 묘지를 참배했다는 이유로 공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에게 긴급 체포됐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했다.
"하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국정원 직원들이 영접을 나왔더군요. 북한에 가서도 안내원들에게 나를 선전도구로 이용하지 말라고 싸워가며 할 말 다 했습니다. 국정원에 끌려가 조사받을 때 겁날 게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고 나와, 앞서 귀국하여 밀양에 자리를 잡은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농촌에 비닐하우스를 만드는 노동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나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시골 생활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돕지 못했다. 그 무렵 고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농사일을 하던 나는 아내와의 불화로 그가 독일에서부터 원했던 시골집을 챙길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그가 고흥에 다녀갔을 때도 제대로 따듯한 밥 한 끼 대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서운한 기색 없이 내 걱정을 했다.
"나
도 언제 감옥에 갈지 모르는 처지지만 힘냅시다. 좋은 날이 오겠지요."
그는 결국 불합리한 재판 끝에 1995년 통일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로부터 초대를 받아 북한에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의 묘지에 참배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나는 대전 교도소에 수감 중인 그에게 큰아들 인효 녀석과 면회를 간 적이 있다. 그는 면회실 유리 벽 사이로 환하게 웃으며 <한겨레>신문을 펼쳐 보였다. 노래하는 큰아들 인효가 대학 진학을 거부하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 등을 위한 서명운동과 함께 거리공연을 하고 있다는 짤막한 기사였다.
"인효야 고맙다. 너 같은 젊은이들이 우리의 희망이다." "성님, 건강은 좀 어떻습니까?""괜찮아요." 한국에 들어오기 전, 독일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해 성치 않은 몸으로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보다는 다른 누군가에게 애정을 품고 살아가는 그는 여전히 당당했다. 그가 예의 그 호탕한 웃음과 함께 덧붙여 말했다.
"걱정 말아요. 여긴 호텔입니다. 조폭들이 내게 인사를 꾸벅꾸벅 합니다. 최OO 회장도 이곳에 있는데 내가 똑바로 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하하! 나중에 내가 감옥에서 나와 골목에서 칼을 맞게 되면 그놈이 사주한 것일 겁니다." 말과 행동이 거침없는 그였지만 이념과 상관없이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도왔고 또한 그와의 인간적인 정을 잊지 못해 감옥조차 불사하고 북한에 다녀왔듯이 그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신세 진 것을 잊지 않는 배려 깊은 사람이었다.
독일에서 함께 생활했던 박충흡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공장 노동자로 생활하면서도 주머니를 털어 조국의 민주화 운동에 힘쓰고 있는 유학생들을 아낌없이 도왔다고 한다. 그런 그였기에 교도소 면회 당시 내가 얼마간의 영치금을 보내 준 것에 거듭 고마움을 표하며 만기 출소하고 나와 꼬박꼬박 밀양 사과를 보내주기도 했다.
또한, 우리 부자가 그가 살고 있는 밀양의 비좁은 서민 아파트에 찾아갔을 때 안방을 내주고 자신은 거실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는 비닐하우스 짓는 골조 작업을 해가며 녹녹지 않은 생활을 꾸려 나갔지만 세월호 참사와 더불어 국정 농단으로 참담하게 무너져 내린 조국의 현실에 늘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촛불 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축하주를 나누자고 할 정도였다.
"송 선생, 지금 뭐 하고 있소. 우리는 지금 축하주 한잔하고 있는데 송 선생도 멀리에서나마 같이 합시다." 하지만 그의 기쁨도 잠시였다. 북한 미사일 발사와 사드 배치 등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극에 달하고 미국의 트럼프는 전쟁 불사를 함부로 내뱉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그와 평소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전화 통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송 선생, 거기 생활을 어떻습니까? 지낼 만합니까.""그럭저럭 잘 지냅니다. 성님도 잘 지내시죠?" "나야 늘 그렇죠. 건강 챙기시고 잘 지내세요." "독일이라도 다시 들어가십니까?""하하! 혹시 압니까? 어디 멀리 떠날지..." 평소에도 말투에 비장감이 묻어있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게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전화 통화하고 한 달이 조금 지날 무렵이었다. 울먹거리는 큰아들 인효로부터 비보를 전해 들었다.
"아빠, 인터넷 검색해봐, 조영삼 아저씨가... 아저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