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행사에서 경찰의 구타로 병원에 입원까지 한 오경렬 민청련 회원. 사진은 퇴원 후 모습으로 그는 이후 민청련, 민통련, 전민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민청련동지회
사실 경찰의 이러한 폭압적인 행태는 당시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민청련은 그것을 의례적인 일로 방치해서 안 된다고 판단했다. 바로 다음 날인 4월 20일, 내외신 기자들을 불러 놓고 '죽음에 죽음이 꼬리를 물고, 폭력에 폭력이 온 사회에 넘쳐흐르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당시 4·19묘지에 배치되었던 사복경찰 및 병력 지휘자의 신원을 밝히고 처벌할 것과 내a무부장관 및 치안본부장이 이 사태에 대해 국민과 민청련에 대해 공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통해 정권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기본 인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민주화의 횃불을 드높이기 위하여한편 이날 기념식에서 민청련은 며칠 전 2차 총회에서 결의한 '민주화의 횃불을 드높이기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우리 사회는 대외적인 예속과 대내적인 독점으로 인해 크게 일그러져 있다"고 보고, 그로 말미암아 "불평등의 심화로 민중생활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세를 조성하고 있는 주체는 '군사독재정권'이며 또한 그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미국'이라고 규정했다.
그 다음에 투쟁방향을 제사할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 동안 복학조치에 대해 침묵하던 민청련이 비로소 그 사안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이다. 정권이 복학 허용 등 일련의 '화합조치'를 편 것에 대한 민청련의 시각은 이러했다.
정권이 유화국면을 조성한 배경은 "첫째 한국을 장기적으로 안정된 시장으로 남겨두기 위해서 극단적인 독재정치로 인해 야기될지 모르는 혼란이나 파국을 막아보려는 외세의 압력, 둘째 교황 방문 등을 앞두고 이제까지 실추된 대외적인 체면을 되찾으려는 전두환 정권의 궁여지책, 셋째 폭력을 통해 집권한 정권에 치명적으로 부족한 국민적 지지기반과 정통성을, 총선을 앞두고 조금이나마 회복하려는 화해 제스처, 넷째 권력 내부 강경파의 무차별한 탄압책만으로는 민주화운동을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온건파 의견의 득세 등"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운동권 안에서 유화국면의 배경을 두고 벌어졌던 논쟁들을 총정리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투쟁방향을 정함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공간을 이용하여 그동안 흩어져 있던 역량들을 결집시켜 내부 조직 역량을 강화시키자고 호소했다. 구체적으로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와 제적생복교대책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해직기자협의회, 노동자복지협의회 등의 결성을 그 사례로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활성화된 부문운동역량을 연대의 틀로 묶어 일종의 '전선'을 형성할 것을 주문했다. 이것은 이후 민청련 활동의 주된 방향이 된다.
햇볕에 드러낸 '광주'4·19집회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민청련은 보다 과감한 집회 개최에 나선다. 당시까지 그 어느 단체도 공개적으로 열지 못했던 광주항쟁 기념식을 갖기로 한 것. 민청련은 집회 장소로 광주 현장 그것도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묘역으로 정했다.
1984년 5월 14일, 오후 2시경 광주항쟁 희생자 127분을 모신 망월동 묘역을 찾아 추모식을 거행하고 참배를 했다. 이 자리에서 김근태 의장은 '광주여, 오!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라는 제목의 광주항쟁 4주년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리고 참배자 일동은 4년 전 민주항쟁의 현장이었던 금남로를 따라 연도의 시민들이 숙연히 지켜보는 가운데 '오월의 노래'를 부르며 가두행진을 했다. 그리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도청 앞 광장 분수대에서 만세 삼창을 외치고 이날의 행사를 마쳤다.
경찰이 불법집회 및 시위라며 강제 연행을 한다고 해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런 만큼 회원들은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경찰도 뜻밖의 행진에 당황했는지 감시만 할뿐 연행은 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은 서울에서 찾아와 공개적으로 추모 행사를 가져준 데 대해 감사했지만, 누구보다도 뿌듯해 했던 이들은 가두 행진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것 자체를 기뻐한 민청련 회원들 자신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민청련은 5월 19일에는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5월과 민족의 혼'이란 주제를 가지고 1000여 명의 재야민주인사, 해직언론인, 해고노동자, 해직교수, 학생 및 기타 많은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집회를 가졌다. 이를 통해 지난 4년 동안 음지에 가려져 있던 광주 항쟁이 대중이 모인 광장에 등장했다. 민청련은 광주항쟁 이후의 폭압적인 분위기를 뚫고 스스로 공개단체로 나선 데 그치지 않고, 광주항쟁도 공개적인 행사의 장으로 불러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행사가 끝날 무렵 흥사단 주변은 전경과 사복경찰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집회 참석자들이 그대로 길거리로 나섰다가는 충돌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집행부는 이날은 일단 집회 자체를 성사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으므로 경찰 측과 대화를 통해 참석자들이 시위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안전한 귀가와 검문 및 검색을 안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의 약속을 받고 귀가하던 50여 명의 참석자들은 결국 이화동 4거리에서 이들을 연행하려던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 측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집단구타를 당하고 회원 김재황 등 5명이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리고 회원 서원기 등 10여 명이 연행되었다.
그런데 이때 이날 경찰의 폭행으로 인해 여성회원 이경은이 임신 6개월의 태아를 사산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다. 민청련 집행부는 즉각 성명서를 내고 폭행자 처벌과 정부 당국의 공개 사과를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