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느 드 브르타뉴이 총명한 브르타뉴 대공은 브르타뉴를 자유롭게 한 여걸이었다
노시경
그녀는 비록 37년의 짧은 생을 살다가 갔지만 낭트 시민들은 그녀를 이 거대한 성의 가장 위대했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낭트 시민들이 낭트의 역사 속에서 그녀를 가장 사랑하고 기리는 것은 당시 그녀가 최선을 다해 브르타뉴 공국의 국정을 돌보았던 진정성을 지닌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총명함과 인내력을 가지고 프랑스로부터 브르타뉴 공국의 권리를 되찾아오기까지 했으니 낭트 시민들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477년에 태어난 그녀는 브르타뉴 공국의 땅덩어리를 빼앗으려는 프랑스의 탐욕스러운 책략을 보고 자랐다. 또한 그녀는 이 성 안에서 그녀 아버지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브르타뉴 공국 내 여러 영주들의 끊임없는 음모를 경험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음모와 탐욕이 가득 찬 세상을 경험하며 학습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아버지가 적법한 남자 후손이 없이 죽자 11세의 어린 나이에 브르타뉴의 대공이 됐다. 일찍부터 나랏일을 보고 자랐던 총명한 그녀는 브르타뉴의 핵심적인 권력을 무리 없이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우 지적이며 얼굴이 아름다운 그녀에게는 여기저기서 구혼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브르타뉴 대공으로서의 그녀는 공국의 운명을 걸고 프랑스 왕인 샤를 8세(Charles Ⅷ), 루이 12세(Louis XII)와 연달아 정략결혼을 하게 됐다. 그녀의 역사를 알게 된 후 동상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눈빛이 더 촉촉하게 느껴진다. 그 눈빛은 나라의 운명에 따라 남편을 정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프랑스의 왕비이자 브르타뉴 대공으로서 브르타뉴를 다스리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중세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종속적인 여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브르타뉴 공국의 자치권을 보호하는 정치력을 발휘해 브르타뉴가 프랑스에 종속되지 않고 반 독립적인 나라로 남을 수 있도록 했다.
그녀가 죽은 후, 브르타뉴 공국은 프랑스 왕권으로부터 지켜온 독립이 완전히 끝나게 됐다. 그녀는 낭트와 브르타뉴를 헌신적으로 돌보았던 마지막 브르타뉴의 대공일 뿐만 아니라 싸우지 않고 화합과 평화의 시대를 열었던 선구적인 여인이었던 것이다.
마치 이 여인은 해자 앞에서, 해자를 건너 들어가기 전에 여인들의 진취적인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 속박에 잡혀있던 여인들의 실력이 비로소 발휘될 때에 어느 사회든 조금씩 더 전진해 나간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안느 드 브르타뉴의 동상을 보면서 우리 역사에도 이토록 귀감이 되는 여성들이 앞으로는 결국 출현할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를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