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맞이 마당정리추석을 며칠 앞두고 어머니가 마당 잔디를 깎고 있다. 아버지는 일을 하실 수는 없었지만, 오랫만에 마당에 나와 잠시 앉아 있다.
이진순
지난 8월, 약 11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시간의 여유가 생긴 상황이라 제주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한 달 조금 더 같이 지냈다. 이제 90의 나이로 일상의 삶에서 남의 도움이 필요한 내 아버지 그리고 일상적 도움이 필요한 남편과 살아가고 있는 88세의 내 어머니.
1~2년 전만 해도 딸의 택배 짐을 등에 지고 가게로 향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빈 몸으로 좇아가며, 가슴이 조금 저릿했다. 그때의 기억이 눈에 선한데, 이제 내 부모는 그 기억 속의 부모가 아니다. 이토록 자연스럽고 당연한 변화들이 내 가슴 속에서 소화되고 받아들여지기까지는 꽤 긴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아직도 그 과정 중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과정에서 함께 했던 게 바로 이 책이다.
치즈코의 '싱글 3부작'의 완결판이라고 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집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탐색기이다. 익숙한 자신의 공간에서 필요한 간병(식사간병, 배설간병, 입욕간병 등)과 의료와 간호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죽어갈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성찰서이다. 죽음에서의 당사자주의라고나 할까? 당연히 이러한 죽음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심심치 않게 얘기되는 방치된 죽음, '고독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노인이 자기 집이 있는데도 삶의 마지막을 그 집에서 보내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놀랍게도 그리고 가만 생각하면 매우 자연스럽게도 가족, 더 정확히는 자식들 때문이라고 한다. '간병' 등 죽음의 과정을 현실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안심과 정당화를 위해 필요한 게 시설이나 병원이라는 것이다.
간병 수준이 높아지고, 그 기간도 길어지고, 핵가족화 되어가면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간병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다. 근대화가 되어가면서 간병이나 임종뿐만 아니라 그동안 가족과 마을 공동체에서 맡아왔던 많은 우리의 일상이 산업의 영역, 전문가의 영역, 자본의 영역으로 빠르게 넘어갔다.
그렇다면, 현실은 병원에서의 죽음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책에는 환자의 사망은 곧 의료의 패배인 연명 치료의 현장에서 환자를 살려내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던 의사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환자가 급하게 병원으로 실려 오고,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노인의 갈비뼈가 부러지고, 괴로움에 찡그리는 노인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죽음의 병원화'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된 의사들의 이야기이다. 조금 더 평온한 죽음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런 문제의식으로 그들은 가정임종의료를 담당하는 의사가 되었다.
아버지는 올 초에 뼈가 부러져서 수술을 하느라 3주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가까이 사는 내 형제들이 교대로 24시간씩 병원에 상주하면서 아버지를 돌봤다. 밤새 잠을 자지 않고, 뽑으면 안 되는 주삿바늘을 빼버리고, 움직이면 안 되는데 자꾸만 화장실을 가겠다고 침대를 내려오려 하는 아버지를 감당하느라 모두가 녹초가 되어버린 3주간이었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이미 그때 병원이 자신에게 얼마나 불편한 공간인지, 삶이든 죽음이든 병원에 이렇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온몸으로 표현하셨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 조금 더 정확하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아버지와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