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공장점거파업 현장, KEC지회는 용역에 의한 폭력과 교섭해태로 일관하는 회사에 교섭을 요구하며 점거파업에 돌입했다. 이상혁 조합원(검은 비니를 쓰고 있다)도 당시 점거파업에 참여했다.
KEC지회
내 머릿속만 시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손배청구 이후 장장 7년동안 우리 공장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손해배상 대상자들은 수시로 삼삼오오 모여 회사가 청구한 301억 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함께 이야기하던 동료들이 한 명, 두 명 청춘을 바쳐 일한 일터를 떠났다. 그렇게 떠난 동료가 수백 명이다.
젊은 시절 청춘을 다 바쳐서 일한 회사인데, 공장 안에 끝까지 남아있었다는 이유로 우리는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천문학적인 금액을 마주했다. 더러는 흔들렸다. 회사와 회사가 고용한 용역들의 온갖 폭력에도 끝까지 공장에 남아있던 이들이 301억 원이라는 무거운 책임에 짓눌려 끝내 공장을 떠났다.
조합원들을 흔든 것 역시 회사의 '불법'이었다. 재판이 길어지는 동안 회사는 301억이라는 금액을 앞세워 당사자를 계속 압박했다. 판결이 나지도 않았는데, 회사는 손배 대상자들에게 협박과 회유를 했다.
이처럼 회사가 노조활동을 막을 목적으로 노조나 조합원을 압박하는 행위는 '부당노동행위'로 엄연히 불법이다. 온갖 제도를 이용해서 '불법'을 저지르는 회사는 '손배가압류'를 이용해서도 '불법'을 저지른 거다.
퇴사로 사람들이 줄어든다고 금액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내가 나가면 동료가 갚아야 하는 금액만 늘어난다. 조정이 결정된 지금도 퇴사를 하면 남아있는 대상자들이 금액을 갚아야 한다. 우리가 '손배가압류'의 목적이 손해를 갚는 게 아니라 '조합탈퇴 및 퇴사용'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24년 다닌 회사가 내민 '퇴사용 손배소장''그만두면 어떨까'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머리 터지게 고민해봐도 방법은 두 가지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합의를 하던지, 아니면 최선의 재판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나는 KEC에서 사회 첫 발을 내딛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취업해 지금까지 쭉 24년을 한 우물에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일한 회사인데, 회사의 불법에 맞섰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소송을 당하고, '퇴사하라'고 압박을 받는다. '퇴사용' 손배 앞에 흔들리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까짓 거 죽기밖에 더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티기로 결심했다.
소장을 받고 1, 2년은 하루하루 지나면서 손배가 현실이 아닌 뜬구름 같은 이야기처럼 느껴지며 무뎌졌다. 그러다 5, 6년 정도 시간이 지나니 재판 결과가 곧 선고가 될 것 같아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동안 회사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나가니까 힘들다', '돈도 못 번다', '취직도 잘 안 된다', '회사 괜히 떠났다, 복직할 수 있으면 다시 일하고 싶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듣다보니, 퇴사하지 않고 버틴 것에 작은 위안을 받았다.
그렇게 버틴 지 7년차인 2016년 9월, '3년 안에 30억을 손배 대상자들이 연대 상환하면 된다'는 법원의 조정이 이뤄졌다. 회사에서 지급되는 돈 중에 최저 생계비 150만 원을 뺀 나머지를 전부 압류해간단다. 뜬구름 같던 손배가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적어도 3년이라는 기간, 3년이면 끝을 볼 수 있는 것, 그것만이라도 최악의 상황은 모면한 것이라고, 최선의 결과라고 받아들였다.
물론 150만 원으로 생계는 힘들다. 그렇다고 절망하고 싶지 않았다. 옳은 일을 했고, 회사의 온갖 탄압과 '불법' 앞에서도 꿋꿋이 버텨냈기 때문이다. 임금 한 푼 못 받고도 버틴 세월도 떠올려보며 마음을 다 잡는다. 결혼 후 10년 육아만 했던 아내도 다시 직장에 다닌다. 그렇게 1년을 보냈고, 이제 2년만 더 버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