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검정창의문 밖에 있다.
이종헌
첫날, 아침 일찍 맹교(현재의 종로구 삼청동 정독도서관 근처)에 있는 김려의 집을 출발하여 자하동, 창의문을 거쳐 세검정을 돌아보고 승가사에서 점심을 먹었다. 다시 승가사를 출발하여 문수문(대남문), 대성문, 행궁, 중흥사를 돌아보고 태고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둘째 날인 27일은 태고사에서 아침을 먹고 용암문과 백운동 암문을 거쳐 상운사 계곡으로 내려가 염폭(현 개연폭포)를 구경하고 대서문, 서수구, 백운동문, 청하동문, 부왕사, 산영루를 구경하고 진국사에서 잤다. 마지막 28일은 진국사를 출발하여 다시 산영루를 돌아보고 동남소문(보국문)을 나와 손가장, 혜화문을 거쳐 맹교로 돌아왔다. 다만 첫날 북한 서남 소문(문수암문)을 이용해 산성으로 들어갔다고 한 부분에서, 본문에 따로 대남문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 문은 오늘날의 청수동 암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되면 이옥 일행은 승가사에서 비봉 능선을 타고 청수동암문을 거쳐 대남문, 대성문, 행궁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밟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옥의 『중흥유기(重興遊記)』와 여타 유산기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대부분의 유산기들이 여정(旅程)에 따른 기술을 택하고 있는 것과 달리 『중흥유기』는 글을 소재에 따라 14개의 독립된 조목으로 나누고 마지막에 <총론(總論)>을 추가하는 <세목화(細目化)>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황아영은 그의 논문 『이옥 유기의 미적 특성』에서 이를 '전체성에 대한 거부'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는데, 전체보다는 부분, 중심적인 것보다는 주변적인 것, 주류가 아닌 비주류를 추구함으로써 성리학과 고문이라는 전체성을 탈피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옥은 그의 유기를 「시일(時日)」, 「반려(伴旅)」, 「행리(行李)」, 「약속(約束)」, 「관해(官廨)」 「초첩(譙堞)」, 「정사(亭榭)」, 「요찰(寮刹)」, 「불상(佛像)」, 「치곤(緇髡)」, 「천석(泉石)」, 「초목(草木)」, 「면식(眠食)」, 「배상(盃觴)」 등 14개 조목으로 나누고 북한산성 유람 길에서 본 사찰, 관청 건물, 정자, 성곽 등과 자연환경 등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어떤 것은 소략하게, 또 어떤 것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승가사를 비롯한 북한산성 내 각 사찰의 규모라든가 승려들의 복식(服飾), 또 「병학지남(兵學指南)」, 「대장청도가(大將淸道歌)」 등의 범패(梵唄)를 소개한 것은 당시 북한산성 내 사찰의 현황과 승려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옥이 『 중흥유기』를 통해 자신의 문학관을 적극 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 속의 사람을 짓되 사람 속의 시를 짓지 말며, 시 속의 경치가 되게 하고 경치 속의 시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作詩中人, 不可作人中詩。爲詩中景, 不可爲景中詩。)"라고 한 「약속(約束)」 조의 언급은 곧 다른 사람의 눈과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린 시를 쓰지 말고 자기만의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시를 쓰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