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한 삶의 줄타기인간과 동물은 '기르는 자'와 '길러지는 자'로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항상 아슬아슬한 것만은 아니다. 서로 애정하고, 공생하는 '관계'속에서 살아간다.
이상희
최근 '동물 복지'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이고 있다. 그 취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동의하는 바이지만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많다. 사회복지의 시작은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달 아래 인간 개인의 탓이 아닌 '사회적 위험'을 국가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개입하여 막기 위해 발달한 분야이다.
사실상 '동물복지'라는 이름 자체는 동물의 '사회적 위험'은 무엇이며, 무엇이 그들의 '삶의 질'에 영향을 주는지 논하는 것 부터가 어렵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동물이 인간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 구성원으로서 인정받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므로 그 필요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허나 나는 그 개념이 과연 축산업의 '식품'으로 인식되어 온 동물들에게도 적용가능한지는 모르겠다. '반려'의 개념으로 인간과 가까이 사는 동물들과 다르게 축산업 내에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은 평생을 '식품'으로 살다 간다. 그리고 더 많은 식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나, 다른 식품을 오염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 안에서 통제되고 학살당한다. 이들에게 같은 '동물복지'를 적용할 수 있을까.
슬프게도, 평생의 대부분을 농장에서 자랐던 나는 축사와 인간의 집이라는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삶의 문제는 다르다고 규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축산농가에서 자라는 동물들에게는 '응급의료를 제공받는 것', '보험이 되는 것',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받는 것'과 같은 문제들 보다 당장에 '식품'으로 평생을 살아가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답은 '동물 복지'가 아닌 전반적인 축산과 관련된 철학을 바꾸어내는 것에 있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고민을 '유기축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기축산은 유기농법을 식물을 기르는 것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축산에 적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유기농법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유기농법은 농업을 단순히 식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살아가는 생태계 안에서 인간이 선택한 먹이를 구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에 가깝다.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 종자를 개량하기 보다는 몇 번을 심어도 비슷하게 생산되는 종자를 선호하고, 적은 노동력으로 많은 식품을 생산하기 위해 약을 치고, 화학비료를 주는 대신 인간이 할 수 있는 안에서의 생산량을 지키는 것. 그런 철학들이 녹아있는 농법이다. 효율성을 바탕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잘 맞지 않은 생산방식이기도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생산하고 버리는 시장의 모순 안에 꼭 필요한 철학이기도 하다.
유기농은 관련 친환경 인증제도가 도입되면서 하나의 유행이 되어버렸고, 인증받은 농산물은 비싼 가격에 팔려나가기 때문에 너나할 것 없이 인증을 받으려 한다. 최근 몇년 사이에는 이 인증의 심사과정이 민영화되어서 너나 할 것 없이 쉽게 '유기농' 인증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유기'농법'은 단순히 친환경 사료를 먹이고, 생물 농약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방법론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과 많은 생명이 관계맺고 있는 '농업'에 대한 고민이 담긴 '가치관'이다.
유기축산은 인간중심성에서 벗어나는 방식의 축산을 이야기한다. 이 '어우러짐'의 방법은 지속가능성과 생물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인간은 생태계의 일부로서 지속가능성과 다양한 생물을 해칠 권리가 없다. 다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생명을 먹으며 자연스러운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기준인 동물 복지와 다른, 생태계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키며 육식을 하는 것은 다른 원리가 분명 필요한 것이다.
인간과 동물, 그 아슬아슬한 공존어린 시절부터 나는 농장에서 자랐다.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오르다 보면 나오는, 어느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농장은 내가 많은 동물들과 함께 성장하게 해준 터전이었다. 놀 거리는 없었고, 마땅히 만날 친구도 없는 동네에서 바쁜 부모와 어린 아이들은 자연스레 농장의 많은 일과 식구들과 부대끼며 살아야했다. 농장의 많은 짐승들은 밥을 나눠먹는 '식구'고 친구였다.
닭들은 돼지 우리에 들어가 돼지밥을 훔쳐먹으며 자랐고, 토끼들은 부모님이 열심히 농사지은 배추밭에 들어가 작물을 훔쳐먹으며 자랐다. 돼지들은 오가는 손님들이 남긴 음식물과 농장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먹었고, 그들의 분뇨는 2-3년간 퇴비장에서 삭혀 다시 밭으로 돌아가 작물의 밥이 되었다.
이런 과정은 농장 안의 모든 존재가 '식품'이기 전에 '생명'일 수 있음을 전제한다. 생명의 신비로움은 죽음까지 포함한 삶의 모든 과정이 서로 얽히고 설켜있음에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농장에서 자란 돼지와 닭을 수없이 먹으며 자랐다. 일손이 바쁠 때에는 도축 작업도 함께 해야했다.
하지만 나한테 농장의 짐승들은 '죽는 순간'과 '식품'으로 기억되지만은 않는다. 밤새 산통을 겪는 어미 돼지 옆에서 새끼를 받아 따뜻한 열전구 아래 누일 때로, 그 돼지 새끼를 잡아먹으러 오는 까마귀를 쫓을 때로, 아직 몸집이 작아 돼지 우리를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시기에는 농장에 놀러 온 손님들에게 꼬리를 흔들며 고기를 얻어 먹는 걸 지켜볼 때로 더 많이 기억된다. 그들은 농장에서 자라는 '식용' 동물이지만, 평생동안 나에게 '식품'은 아니었다. 그저 나에게는 식구이면서도 친구였다. 그들에게도 언젠가 나의 존재가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제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 죽는 경우를 고려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은 생태계 내의 흔한 '죽음의 이유'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인간의 삶에서의 죽음은 누군가의 실수나 사고로, 혹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누군가의 악의로 이루어진 경험이다. 그러나 야생이나 축산업 내의 동물들이 겪는 죽음의 의미는 다르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 인간의 죽음이 그 삶의 모든 의미를 결정하지 않듯이 동물의 죽음도 그들의 삶과 분리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모든 과정들이 그들의 죽음을 모두 정당화하진 않는다. 그러나 사실 잡식을 하는 짐승인 인간으로 산다는 건 평생을 이런 윤리적 고민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무조건적인 생명의 죽음을 부정하는 방식이나 인간다운 삶을 그들에게도 적용하는 방식으로는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동물들의 파편화된 삶이 하나의 삶으로 다시 이해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동물들은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인간의 편리에만 맞추어진 그들의 삶은 상당히 괴로울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좁고 더운 한국의 동물원에서 살아가는 북극곰, 평생을 착취당하고 여행상품이 된 코끼리, 정력에 좋다는 명목으로 사라져간 수많은 야생동물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또한 반려동물과 애완동물의 사이에도 존재하고, 유기축산 농가와 공장식 밀집사육농가 사이에도 존재한다. 같은 종이라고 하더라도 '식용 개'와 '반려견'의 삶에서 드러나는 차이이기도 하다.
이 모든 문제를 한번에 푸는 방법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양한 존재들의 삶과 억압을 고민하는 것으로 이 '아슬아슬한 공존'의 굴레를 어떻게 해쳐나갈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경험해온 농장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과 나눴던 나의 삶은 인간을 포함한 많은 동물들의 삶을 보다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한 생명 안에서 태어남과 죽음의 연속성이 이해되고, 다양한 생명들의 삶이 연결되는 새로운 공존을 꿈꿔본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3
연구활동가.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운영위원.
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 싸람의 기록자.
공유하기
'살코기' 된 동물에게도 동물복지가 가능할까요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