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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측의농간
언어란 얼마나 저절로 그 지시성 이상의 의미를 뛰어넘어 그것의 수천 년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18쪽)
여성성의 진정한 의미는 성적 에로티시즘이 아니다. (52쪽)'잘 먹고 잘 살기'의 신화는 절대적인 물질적 부족은 해결했지만, 그 대신 끝도 없는 상대적 결핍감과, 망가져 치유불가능한 환경을 인간에게 안겨 주었다. (58쪽)우리는 시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우리는 동시나 동화를, 소설이나 수필을, 숱한 문학을 어떻게 읽으면 될까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시집 앞뒤에 붙은 추천글은 숱한 일본 한자말하고 영어를 뒤섞은 전문 비평이나 평론입니다. 비평이나 평론은 도무지 이 땅에 발을 붙이려 하지 않아요.
집에서 마을에서 가게에서 논밭에서 바다에서 골짜기에서 주고받는 말로는 문학도 평론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여기는 한국 사회 흐름이지 싶어요. 어쩌면 이런 모습은 속 없는 모습일 만합니다. 알맹이는 없이 껍데기만 시끌벅적하다고 할 만합니다. 속살을 가꾸지 않고 쭉정이만 한들거리는 모습일 수 있어요.
'고려 속요의 민중적 명랑성은 조선시대 유교 이데올로기 밑에서 질식해 버린다. 그러나 여성이 철저하게 억압되었던 이 사회에서도 재능 있는 여성들은 숨어서 조용히 자신들의 문학세계를 가꾸어 왔다.'(122쪽)
'80년대에 우리는 지독히 불행했다. 그 불행한 시대에 우리는 다행히도 뛰어난 시인들을 얻었다. 그러면 80년대는 위대한 시대이다. 아니다, 이 말은 거짓이다. 80년대에조차 뛰어난 시를 쓴 시인들은 위대하다, 라고 고쳐 말해야 한다.'(144쪽)김정란 님은 시를 시답게 읽고 싶어서 스스로 시를 비평하는 글을 써 보았다고 합니다. 숱한 교수하고 전문가는 도무지 시를 제대로 안 읽는구나 싶어서 '남 탓'을 멈추고서 스스로 시를 말해 보려고 했대요.
시나 소설을 다룬 비평하고 평론이 어렵다거나 뜬구름을 잡는다거나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느낄 분은 꽤 많을 수 있습니다. 또는 아예 비평이나 평론하고는 담을 쌓는 분이 많을 수 있어요. 비평이나 평론은 마치 '그들끼리 놀며 텃힘을 부리는 앞마당'일는지 모르지요.
<비어 있는 중심>(미완의 시학, 최측의농간 펴냄)은 문학은 있되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은 좀처럼 없는 듯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 이제부터는 속·알맹이·속살을 밝히고 싶은 작은 몸짓을 드러내는 비평책 또는 평론책입니다.
글쓴이 김정란 님은 시를 더욱 시답게 읽고 싶은 마음으로 숱한 남성 평론가가 놓치는 대목을 새롭게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김정란 님이 여성이기 때문에 하는 평론이 아닌, 또 남성 평론가가 남성이기 때문에 못 보거나 놓치는 대목이 있어서 하는 평론도 아닌, 삶을 깊고 넓게 바라보는 '한 사람'으로서 시를 평화롭고 평등하게 느끼는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는구나 싶어요.
양선희는 거침없이 세계를 벗겨 보인다. 그런데 그녀는 세계를 벗기면서 자기도 벗는다. 세계는 신비롭지 않다. 시인도 신비롭지 않다. (249쪽)신화는 인간이 자연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인식을 소유하고 있었을 때 인간이 자연에 대해 알고 있었던 지식의 구조이다. (451쪽)비평이나 평론을 읽자면 먼저 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문학을 읽지 않고는 누가 들려주는 비평이나 평론을 함께 느끼거나 헤아리기는 어렵거든요. 그런데 잘 쓴 비평이나 평론이라면, 이 비평이나 평론을 읽고서 '이 비평이나 평론을 받은 그 문학이 궁금한 걸?'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아니, 비평이나 평론이 제자리를 찾으려 한다면, 아직 어느 문학을 만나거나 읽지 못한 이웃들한테 '이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멋지거나 사랑스러운 문학을 함께 읽어 보면 어떨까요?' 하고 손을 내미는 글이어야지 싶어요.
사람들이 다 읽거나 널리 읽은 작품을 놓고서 쓰는 비평이나 평론을 넘어서, 아직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거나 가까이하지 못한 문학을 비평가나 평론가 스스로 캐내어서 가장 쉬운 말과 아주 부드러운 말씨로 조곤조곤 속삭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