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외교 문화 예술에서도 업적 많아"한글학회 권재일 회장이 신숙주 선생의 업적을 설명하고 있다.
신향식
- 허웅전 한글학회 이사장이 작성한 사적비문에도 선생을 기린 내용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네, 맞습니다.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하늘이 우리 겨레에 복을 내리사 불세출(不世出)의 준재(俊才)를 이 땅에 보내시어 어진 임금을 보필함으로써 인류 문화의 금자탑인 한글을 창제하게 하시고 두 번이나 영의정의 대임(大任)을 맡으시어 외교·국방·문화면에 이르기까지 널리 탁월한 치적을 낳게 하시니 그분이 바로 보한재 신숙주 선생이시다. 성장함에 따라 뛰어난 예지는 하나를 들어 열을 깨쳤고, 비범한 문재(文才)는 당대 선비들이 매우 놀라는 바였다. 세종께서 한글을 반포하실 제 대왕을 협찬한 여덟 신하의 한 사람으로 선생을 뽑으셨거니와 오묘한 뜻과 어려운 이치는 선생의 깊은 조예를 힘입어 밝혀진 것이 많았다.'"
- 그밖에 또 어떤 사연이 있나요? "훈민정음 반포 직전인 1445년에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같은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동시 통역사인 손수산과 함께 중국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는 방법에 관한 조언을 받고자 요동반도에 유배를 와 있던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에 다녀왔다는 얘기는 <세종실록>에 기록돼 있습니다. 신도비문 등에 무려 13번을 다녀왔다고까지 기록해 놓았습니다. 실제로 그 먼 곳을 13번이나 다녀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훈민정음 연구를 위해 그의 젊음을 다 바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때의 고달픈 여정 속에서 성삼문과 주고받은 시가 <보한재집>에 남아 있어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 옛 문헌에도 선생의 역할이 남아 있겠군요."<세종실록>은 신숙주 선생과 성삼문이 황찬을 만나러 간 사건을 간단하게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성종실록>에는 이창신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남겨 놓았습니다. 성종 때인 1487년에 이창신은 '세종조에 신숙주·성삼문 등을 보내어 요동에 가서 황찬에게 어음(語音)과 자훈(字訓)을 묻게 해 <홍무정운>과 <사성통고> 등의 책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서 한자 훈을 대강 알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실록 1487년 2월 2일)."
- 선생의 최고 집필서를 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동국정운>이 대표집필입니다. 신숙주 선생은 1447(세종 29)년 31살 때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집현전 응교가 됐습니다. <동국정운>·<사성통고> 편찬의 핵심 역할을 한 것입니다. 1445년 2월 집현전 원로학자들이 훈민정음 보급을 반대하자 세종은 '그대들은 운서를 아시오' 하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중국 한자와 한자음 사전인 운서에 관한 연구는 훈민정음 연구의 바탕이었고 운서에 훈민정음으로 발음을 기록한 책은 훈민정음의 놀라운 기능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신숙주 선생의 최고 한글 업적은 1448년 펴낸 우리식 표준 운서인 <동국정운>을 대표로 집필한 걸로 들 수 있습니다."
- <동국정운>에는 뭐라고 적혀 있나요?"<동국정운> 머리말에서 선생은 '이제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하나의 소리라도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실로 정음이 음을 전하는 중심 줄이 되었다(自正音作而萬古一聲, 毫釐不差, 實傳音之樞紐也)'고 했습니다. 또, '아아, 소리를 살펴서 음을 알고, 음을 살펴서 음악을 알며, 음악을 살펴서 정치를 알게 되나니, 뒤에 보는 이들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으리로다(吁! 審聲以知音, 審音以知樂, 審樂以知政, 後之觀者, 其必有所得矣)'고 감동을 적었습니다."
- <동국정운>의 언어학적 가치는 어느 정도인가요?"신숙주 선생은<동국정운>을 펴낸 것만으로도 훈민정음 연구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중국 황제와 지식인들이 중국 한자음을 적기 위한 고뇌가 담겨 있는 책이 운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천 년 넘게 적지 못한 발음을 적을 수 있게 된 기쁨을 신숙주 선생은<홍무정운역훈> 서문에서 '우리 동방에서 천백여 년이나 알지 못하던 것을 열흘이 못 가서 배울 수 있으며, 진실로 깊이 생각하고 되풀이하여 이를 해득하면 성운학이 어찌 자세히 밝히기 어렵겠는가(東方千百載所未知者. 可不浹旬而學. 苟能沉潛反復. 有得乎是. 則聲韻之學. 豈難精哉)' 하면서 적은 것입니다."
"신숙주 선생이 변절자? 잘못 알려진 측면 많아"한편, 이번 학술대회에 함께 참여하는 훈민정음 연구가 김슬옹 박사는 "신숙주 선생이 변절자라는 주장도 사실은 잘못 알려진 측면이 많다"면서 "이분법적으로 선생을 매도할 수는 없고, 오히려 우리 후손들은 선생이 남긴 업적의 덕을 많이 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슬옹 박사와의 일문일답 내용.
- 신숙주 선생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한글이 해례본을 통해 제대로 세상에 반포될 수 있었던 것은 음운과 문자 연구에 남다른 신숙주 선생의 눈물겨운 노고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생의 업적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이제라도 선생을 온당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세종대왕께서도 선생의 역량을 인정하셨고, 신임도도 높았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 한글 창제에 선생의 공로가 크다는 말씀이군요."창제는 1443년에 세종이 비밀리에 한 것입니다. 그것을 널리 알리는 해례본 집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 신숙주 선생입니다. 한글은 배우기 쉽고 쓰기 쉬워서 우리말을 적는 글로서도 완전합니다. 특히 제자(制字) 원리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으뜸가는 문자입니다. 이런 한글 해설서 집필에 선생의 공이 가장 컸습니다. 우리 후손들이 잊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