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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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라도 수업을 계속해야 하나 자괴감이 들어 맥이 풀릴 때쯤, 독서삼매경에 빠진 한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교과서를 덮어둔 채 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있었다. 그 아이만의 문제도 아닌데 지목해 나무랄 수도 없어, 수업을 하다 말고 그에게 다가가 소감이라도 들어볼 요량으로 말을 건넸다. 그와의 대화가 내게 '비수'가 되어 돌아올 줄은 그땐 미처 몰랐다.
얼마 전 영화 <남한산성>을 보았는데,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원작 소설을 찾아 읽고 싶어졌다는 거다. 러닝 타임이 두 시간 반 가까운 긴 영화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면서,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곧장 서점에 달려가 구입했단다. 책을 읽다 보니 마치 영화를 한 번 더 보는 느낌이 들어 좋다고 했다. 또, 책을 읽고 난 뒤 영화를 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고도 했다.
그는 영화와 소설에서는 분명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이 뒤섞여 있을 텐데도 전혀 구분되지 않았다면서, 병자호란 당시의 역사 기록을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욕심을 밝히기도 했다. 모르긴 해도,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곧장 또 서점에 달려가 <조선왕조실록>이나 <산성일기> 등을 구입해 탐독하게 될 것 같다. 그런 그에게 수업시간에 딴 짓을 한다고 나무랄 순 없었다.
그것이 진짜 공부였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공부란 자발적 동기를 유발해 지적 호기심을 충족해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에게 영화 관람이 원작 소설을 사서 읽도록 자발적 동기를 부여했고, 나아가 허구가 아닌 사실을 알기 위해 역사 기록을 찾아보도록 이끌었으니, 비록 수업시간 되바라진 모습을 보였다 해도, 역사 공부 하나만큼은 제대로 하고 있었던 셈이다.
수업은 이내 영화 <남한산성>을 본 아이들이 주도하며 감상평을 나누는 시간이 돼버렸다. 전에 볼 수 없었던 활기가 넘쳐났지만, 명색이 교사로서는 부끄럽고 참담했다. 고작 영화 한 편보다 못한 수업을 1년 내내 해왔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토록 활기찬 아이들을 내내 졸거나 딴 짓 하도록 방치해왔으니 무능하다고 손가락질당해도 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긴 얼마 전 영화 <택시 운전사>가 인기를 끌었을 때도 그랬다. 해마다 5월이면 잊지 않고 계기교육을 실시해오고 있지만, 적잖은 아이들이 여전히 5.18과 5.16을 헛갈려한다. 심지어 5.18이 6.25 전쟁보다 앞서 일어난 일이라 답하는 경우도 봤다. 그랬던 아이들이 영화를 본 뒤 5.18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며, 자발적으로 모둠을 꾸려 5.18 사적지로 답사를 가자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영화 <택시 운전사>가 목석같던 아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영화를 본 뒤,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멋모르고 봤던 영화 <화려한 휴가>와 <26년>을 다시 찾아보게 됐다는 이야기부터, 지지난 주말에 친구들과 시내버스를 타고 망월동 묘역을 다녀왔다는 아이도 있었다. 부끄럽지만, 수많은 교사가 엄두조차 내지 못한 일을 영화가 보란 듯 대신해주고 있는 셈이다.
자괴감 속에 길고 길었던 수업이 끝났다. 영화를 통해 역사 공부의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얻었다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교실을 나오려니 뒤통수가 따갑다. 아무리 알찬 수업이라도 일단 재미가 없으면 요즘 아이들에겐 가차 없이 버림받는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과연 나는 아이들로부터 저 영화들처럼 사랑 받는 유능한 교사로 거듭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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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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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이 미치도록 부러운 역사교사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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