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학교 임형진
최윤실
임형진 교수는 3·1운동은 제 2의 동학혁명이라 주장한다. 서른 네 살의 젊은 북접이었고 동학혁명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최고 지도자 손병희 선생이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사각모에 숨겨 온 독립선언계획을 받아들이고 조직하는 과정은 상당히 흥미롭다. 손병희 선생이 각 종파 대표들을 설득하는 모습과 3·1 운동을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혁명으로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오" 3·1 독립 선언을 앞두고 천도교 간부들에게 다짐했다며 전해지는 말은 손병희 선생의 절실함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3·1 독립선언서 이전에 일본과 만주에서는 무오대한독립선언이 있었다. 해외에서 활약하는 39명의 독립운동가들이 발표한 이 선언과 문재인 대통령도 천명했던 1917년 대동단결 선언이 100주년을 맞이하는데 그 차이점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39명의 독립운동가 중에서는 변절자가 나오지 않았는데 33명의 기미독립선언에 참가한 분들 중에서 신념을 바꾼 사람이 나온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들을 수 있다.
임형진 교수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던 최남선, 이광수가 변절을 함으로써 미친 영향이 어떠했는지도 설명한다.
3·1 독립선언서는 "선언" 그 자체가 엄청난 파급력을 미쳤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뿐만 아니라 우리 동포가 있는 해외 어디서든 거리에서 만세 운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1919년 10만 5천 명 정도가 만주, 용정을 비롯해서 일본 동경, 오사카 등 세계 곳곳에서 비폭력이라는 대 원칙 안에서 만세의 물결을 만들어 냈다.
독립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는 철저한 폭압 속에서도 기미년 일 년 내내 시위가 지속되는 힘을 잃지 않았고 1주년이 되었을 때는 그 기념으로 다시 한 번 크게 만세 운동이 점화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옥고를 치르거나 억압을 당했던 이종일 선생, 한용운, 선생, 신채호 선생 등은 조선 독립의 선언을 계속 만들어 내며 그 불씨를 좀처럼 꺼뜨리지 않았다. 임형진 교수는 그 물결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독립선언서의 가치를 환기시킨다.
임시정부에서도 독립선언서의 힘을 받아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기치를 더욱 드높였으며 제국주의에 비판을 가하고 궁극적으로는 동양평화라는 기치를 내걸어서 바깥세상에 어필을 한 것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변화를 주게 된다· 그 파급효과는 만주의 만세 운동이 바뀌는 근거를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