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 중 황제펭귄들의 허들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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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인류애 돋는 명상도 누군가가 나를 건드리기 전까지만 가능하다. 진짜 죽겠다 싶을 정도로 압박이 심하면 욕이 터져 나오고 싸움이 날 때도 있다. 나도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적이 있다.
세 줄 공식이 지켜질 정도로 지하철 객실이 널널한 어느 날 아침이었다. 나는 좌석 앞줄에서 서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뒷줄에 선 어떤 사람이 자꾸 내 등짝을 간질이며 살짝살짝 밀어댔다. 돌아보니 내 나이 또래의 어떤 여자가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눈치를 준답시고 나는 몇 번 뒤를 돌아보며 헛기침을 해댔다. 이쯤 하면 알아듣고 안전거리를 확보해 주리라 기대하며 말이다. 그때 뒤에 있던 여자가 매몰차게 말했다.
"아, 지가 앞으로 가면 쫌 될 거 아냐. 짜증나게."지? 지? 방금 저 여자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지'라고 했다. 심지어 말도 놨다! 꺼져가는 정신의 퓨즈를 부여잡으며 나는 낮은 목소리로 답변했다.
"자리 없는데요." "지가 가면 쫌 될 거 아냐"... 저게 날 우습게 봤다최대한 신사적인 멘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도발은 계속 됐다. 조금만 돌아서면 되는데 버티고 서서 휴대전화로 계속 내 등을 밀쳐댔다. 나도 복수한답시고 소심하게 백팩을 휙휙 고쳐 매길 여러 차례. "아, 짜증나 미치겠네"라며 말하며 몇 번 째려보기도 했다. 나이도 비슷한 주제에 나를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서 속에서는 자꾸 천불이 났다.
'네가 뭔데 나한테 반말을 해? 사과해. 나한테 사과하란 말이야!' 마음의 소리가 생중계 됐는지, 그 여자는 뒤에서 '쯧쯧쯧' 하고 혀를 차더니 바로 한 정거장 앞에서 내렸다. 약이 바짝 올랐다. 저게 날 우습게 보는 게 틀림없다. 뒤 따라 내려서 머리 끄댕이를 잡아채서 그대로 지하철 승강장에 내리 꽂을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곧 침울해졌다. 낯모르는 타인으로부터 막말 한마디 들었다고 때릴 생각을 하다니…. 황제펭귄은 무슨, 얼어죽을.
익명의 군중에 대한 분노. 나는 어쩌다 자리가 좁다는 사실만으로도 쉽게 분개하는 사람이 돼버렸나. 변명하자면, 화살을 많이 맞아서 그렇다. 회사에서 각종 갑들한테 총알받이가 돼 살다 보니 인성이 개차반이 돼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