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민음사
<82년생 김지영>은 알고 있었던 책이다. 라디오에서 조남주 작가의 인터뷰까지 꼼꼼하게 챙겨 들었다. 하지만 시급인생이 되고 책 한 권 사는 게 만만치 않았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눈을 뜨니 새벽이었다. 예전에는 오후까지 거뜬히 잘 수 있었는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몸의 리듬이 바뀌었다.
바다가 보고 싶어 게스트하우스 옥상에 나가려는데 탁자에 덩그라니 <82년생 김지영> 책이 있었다. 나와 함께 여행을 온 것만 같았다. 여기서 만날 인연이었나보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스멀스멀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81년생인 나는 지영씨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 다만 아버지는 공무원이 아니었고, 가족을 버린 떠돌이었다. 아버지 때문인지, 덕분인지 평범하지 못했던 나는 지영씨의 평범함이 부러웠다.
평범한 사람이 어디 있으며, 평범하지 않는 경험이 있을까. '평범'하다는 말의 함정을 벗어나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래야 나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2015년 가을'부터 몰입했다. 스물 여섯에 결혼해서 12년 동안 시댁에서 지낸 명절과 제사가 스쳤다. 첫 제사를 지내고 올라오는 차에서 남편에게 제사의 부조리함을 꼬치꼬치 캐물었고, 남편은 자기도 어쩔 수 없다며 화를 냈다.
그날 결혼을 후회했다. 결혼에 대한 후회도 잠시, 연달아 아이 둘을 낳아서 키우는 동안 서른이 훌쩍 넘었다. 나의 존재를 묻고 대답을 찾을 겨를이 없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밥을 먹이는 지루함을 견뎌내야 했다.
남편은 자신이 일중독자인 줄도 모른 채 밤늦게 들어왔고, 나는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뒤통수까지 미웠고, 어떻게 죽으면 남편이 자신의 무심함을 후회할까. 밑도 끝도 없는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그때 산후우울증으로 자살한 대학 후배가 생각났다. 밤에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중얼거렸다.
"미정아, 네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지영씨의 어머니가 지영씨의 여동생을 지우며 '아무것도 어머니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모든 것은 어머니의 책임이었다.' 문장은 송곳 같았다. 아픔과 죄책감을 끌어안고 낙태를 선택한 친구들. 낙태 경험이 없음을 다행이라고 얘기하는 것조차 미안한 건 왜일까.
지난 제사 때 시댁 고모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니는 아들을 못 낳으니까 시댁에 와서 큰 소리를 못 치지." 남의 인생에 참견하는 '별난' 사람들을 대처하는 '무시'라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상처받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첫 제사처럼 싸우기도 싫었다. 시댁 고모 때문에 남편과 나의 관계를 망칠 수 없었다. 지영씨 어머니 세대가 내게도 고스란히 머물고 있다.
지영씨의 학교 생활은 나와 닮은 구석이 많다. 소소한 사건들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까지도 말이다. 남자 짝지의 괴롭힘은 비슷했고, 급식 순서를 바꾸는 과정을 지켜보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삶의 부조리함을 바꾸려는 노력은 언제나 버겁다.
내게도 남녀차별이 있었다. 식당에서 일했던 엄마는 밤늦게 들어오셨고, 저녁밥을 차리는 건 내 몫이었다. 오빠는 밥을 먹고 다시 TV를 보고, 나는 설거지를 했다. 그때 오빠에게 "내가 밥을 차렸으니까, 설거지는 오빠가 해"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엄마도 오빠 보고 하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 모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지영씨가 바바리맨을 만났을 때 내가 만난 바바리맨이 떠올랐다. 횡단보도 저 편에서 자신의 성기를 만지고 있던 아저씨. 느끼한 웃음으로 횡단보도를 스쳐갈 때 두려웠다. 중학교로 가던 비좁은 버스 안에서 내 몸에 손을 댔던 고등학생 오빠들. 그때 소리치지 못했던 나를 탓하기보다 안아주고 싶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일찍 성에 눈 뜬 남자애들이 여자애들을 성추행했다. 가슴이 봉긋해지기 시작한 여자애들의 브래지어를 당기는 것은 기본이었고, 성적인 농담도 서슴지 않았다. 어느 날 교실 뒤에서 남자애가 여자애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소리를 질렀고 남자애는 도망가 버렸다.
나와 몇몇의 친구들이 담임선생님께 말했다. 남자 담임은 아무런 조치도 취해주지 않은 채 억울하게 호소하는 우리 앞에서 서류만 만지작거렸다. 어쩔 수 없이 옆반 여자선생님께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자기반 애들이 아니라며 아무런 해결책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너무 끔찍해서 꽁꽁 싸맸던 기억이었다.
대학에 간 지영씨는 동아리 엠티를 가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이유로 '씹다버린 껌'이 된다. 다채로운 연애경험을 가진 여성을 '걸레'라고 하고, 남녀가 동거하다가 헤어지면 여자만 색안경으로 바라보는 시선들. 씹다버린 껌이라고 말한 선배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지영씨가 안타깝고 답답했다.
취업을 준비하는 지영씨를 읽을 때는 피곤했다. 지방대를 나와서 서울에서 취업을 했던 내가 느낀 장벽이 떠올랐다. 어렵게 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회사는 대학로에 있고, 나는 방을 얻을 돈이 없었다. 경기도에 사는 친구 집에 얹혀서 살았는데, 집에서 회사까지 2시간 거리였다. 매일 4시간을 지하철에서 보냈다. 돈은 모아지지 않았고, 마약 같은 서울 살이에 지친 나는 결혼으로 도피했다.
지영씨의 면접 질문을 들으며 최근에 면접 본 게 생각났다. 24시간 보살핌의 노동에서 벗어났을 때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럴 때마다 빠지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남편은 무얼 하나요?" 남편이 아니라, 내가 일하러 왔는데 남편의 직업을 왜 물을까. 남자가 면접을 본다면 아내의 직업을 물을까.
취직을 못한 지영씨에게 아버지가 "넌 그냥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 그때 엄마가 말한다. "지영아, 너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알았지?" 엄마의 말에 속이 후련했다. 저렇게 말하지 않으면 여자는 얌전히 있어야 하는 존재로 길들여진다.
지영씨는 회사를 다니며, 2012년 결혼을 한다. 어른들은 '좋은 소식'을 기다리지만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할 자신이 없는 지영씨는 육아를 얘기할 때면 손해 보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임신한 지영씨와 남편은 많은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결국 지영씨가 짊어져야 할 것이 많다. 지영씨는 남편이 육아를 '돕는다'는 말에 불쑥 화를 낸다.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나도 남편에게 했던 말이다. 남편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 말한다. 결혼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일은 같이 하는 거라고. '돕는다'는 말이 결국 남자를 제3자로 만드는 거라고. 몇 명은 진심으로 알아듣고, 몇 명은 의심의 눈초리로 "너는 왜 그렇게 민감해?"라고 말했다.
결국 육아 때문에 퇴사를 결정한 지영씨는 대한민국 기혼여성 다섯 명 중의 한 명이 된다. 태어날 때 너무 예뻐서 울었던 아기는 안아주지 않으면 밤이고 낮이고 운다. 결국 지영씨는 손목이 아파 병원에 간다.
할아버지 의사는 옛날 이야기를 하며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거지?" 나도 둘째를 낳고 손목이 아파 한의원에 다닐 때 들었던 말이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
그러나 누군가 다시 말한다면 요즘 나의 화두 를 말할 것이다. '비교 없이 말할 수는 없을까'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 얼룩진 말을 빼고, 비교없이 말하고 싶다. 누군가 비교해서 힘들거나, 괜찮기보다 힘들다면 그저 '힘들구나'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