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성금으로 미국 갔을 때 워싱턴 덜레스 공항 입국장에 마중나온 재미동포들(가운데 흰옷 권중희 선생, 그 오른쪽 필자)
박도
우리 출판계의 현실
출판사 대표 부부와 따님 그리고 한 직원이었다. 셋은 가족으로 가족 외 직원은 1인이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출판계의 대체적인 현실이다. 그날 나는 직원에게 재고를 묻자 그는 '박도 선생님 저서 재고 현황표'를 출력해줬다.
나는 눈빛출판사에서 2004년부터 거의 해마다 1권 정도로 모두 14권을 출판했는데 8종은 품절상태로 재고가 없었다. 그러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847권, <항일유적답사기> 348권, <약속> 407권, <허형식 장군> 157권이라는 숫자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앞의 두 책은 2쇄, 3쇄라서 조금은 이해가 갔으나 <약속>과 <허형식 장군>은 고향 구미를 배경으로 내 고향에는 일본군 장교만 아니라 이런 항일명장도 있다는, 필생의 작업으로 썼는데 초판도 나가지 않다니….
그 순간, 나는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함께 불황에 허덕이는 출판사를 돕고자 이즈음 유행하는 스토리펀딩을 하면 재고 책도 줄이고, 이참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가서 한국전쟁 자료도 입수해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 일감(프로젝트)은 '도랑치고 가재 잡는 일거양득이다'라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그 자리에서 이 구상을 제안하자 이규상 대표는 당신이 판매에 소홀히 해서 빚어진 결과라고 만류했다.
집에 돌아온 뒤 아내한테 상의하자 아내도 극구 반대했다. 이제 "당신은 남의 신세를 질 나이가 아니라는 것"과 아침저녁마다 약을 한 봉투씩 먹고 지내는 내 건강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생각을 접지 못하고, 스토리펀딩에 성공한 고상만 시민기자, 그리고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과 상의했다. 그러자 두 분 모두 스토리펀딩 목적이 뚜렷하기에 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진단해줬다. 결국 지난 6월 12일부터 다음 카카오 측과 스토리펀딩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을 시작했다. 내가 한국전쟁 사진을 입수하게 된 계기는 <오마이뉴스>이기 때문에, <오마이뉴스> 편집부에 상의하자 동시 게재도 가능하다고 해 두 매체에 연재하게 됐다.
사실 나는 2003년 11월에 <오마이뉴스>를 통해 스토리펀딩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백범암살 배후진상규명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인 바 있었다. 그때 모금 개시 12일 만에 목표액 3000만 원을 거뜬히 돌파했다. 뜻밖에도 '화장실이 어디입니까?'라는 말도 영어로 말할 줄 모르는 내가 고 권중희 선생님을 모시고 미국에 갔다. 그곳 워싱턴 근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47일간 체류하면서 여러 문서와 사진 자료를 입수해 온 적이 있었다.
느긋하게 기다려 보십시오지난 6월 12일,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스토리펀딩 제1회를 다음 카카오와 <오마이뉴스>에 동시 송고했다.
두 매체 모두 조회수는 엄청 높았으나 후원금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나는 매회 기사(스토리)를 알차게 하고자 내 집에 있는 자료는 물론, 원주시립중앙도서관을 뒤지며 온갖 정성을 다 쏟아 집필한 다음 거기에 알맞은 사진을 골라 삽입한 뒤 송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