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야언>.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사람에 따라서는 황희에 더해 맹사성을 거명할 수도 있겠지만, 허봉은 허조를 언급했다. 같은 허씨라는 요인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허봉은 하양 허씨는 아니고 양천 허씨다. 양천 허씨 역시 허황옥의 후손이다. 양천 허씨는 서울시 양천구 및 강서구 일부를 근거지로 했다.
요즘 강서구 장애인 특수학교 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동의보감>의 허준도 양천 허씨다.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허준이 이 지역과 인연이 있으므로 해당 부지에 특수학교가 아닌 한방병원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 말기 공민왕 때 출생한 허조는 천재 소리를 들을 만했다. 15세에 진사시험에 급제하고 17세에 생원시험에 급제했다. 22세에는 대과까지 급제했다. 서른 이전에 대과에 급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허조는 10대 때 진사·생원 자격을 획득한 데 이어 20대 초반에 대과까지 마무리했다.
고려 멸망 2년 전인 1390년에 관직을 받은 허조는 조선왕조 들어서는 태종과 세종 때 두각을 보였다. 이 시대의 각종 의례 제정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 성격이 강직하고 공정해서 태종 이방원과 일시적인 불화를 겪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신망을 얻어 명재상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런데 허조는 신체적으로 불편했다. 불편함의 정도가 보통 수준을 뛰어넘었다. <해동야언>에서는 그의 외모를 이렇게 기술했다.
"공은 어려서부터 체격이 깎은 듯이 여의고 파리했으며, 어깨와 등이 굽어 있었다."<해동야언>을 지은 허봉은 선비 출신 관료다. 선비 출신들은 다른 사람의 외모나 신체적 약점을 가급적 거론하지 않았다. 일례로, <광해군일기>를 기록한 사관(역사 기록관)은 광해군 정권의 실세 상궁인 김개시의 예쁘지 않은 얼굴을 두고 "나이가 들어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는 우회적 표현으로 기술했다. <광해군일기>를 편찬한 사람들은 광해군 정권에 적대적이었다. 그런데도 김개시의 외모를 조심스레 거론한 것이다.
이런 선비들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허조의 신체적 불편함이 미미했다면 허봉이 "어깨와 등이 굽어 있었다"는 문장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불편함이 상당한 수준이고 세상의 눈에 쉽게 띌 정도였기에, 언급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어깨와 등이 심하게 굽었던 듯하다.
다리 절었던 한명회, 한쪽 눈이 안 보인 채제공우리 시대는 장애인 인권에 대해 말을 많이 하지만, 허조 같은 신체적 조건을 가진 이들을 위정자 반열에 쉽게 올려놓지 못한다. '외모는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우리 시대는 외형에 점점 더 많이 신경 쓰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를 포함한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옛날 사람들은 허조처럼 불편한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모두 다 그러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그랬다. 그래서 그런 이들의 고위직 진출이 자연스레 이루어질 수 있었다.
허조와 비슷한 사례는 많다. 수양대군 세조시대의 실세 정치인인 한명회도 그랬고, 정조시대의 번영을 주도한 재상 채제공도 그랬다. 1905년 4월 27일자 <황성신문>에 이런 말이 있다.
"한명회와 채제공은 한쪽은 절름발이였고 한쪽은 애꾸눈이었다."한명회는 다리를 절었고, 채제공은 한쪽 눈이 안 보였다. 채제공은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걸로 그치지 않았다. 양쪽 눈의 방향이 서로 다른 사시이기도 했다. 초상화를 유심히 보면 눈의 방향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