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사드의 역사를 다룬 고든 토마스의 <기드온의 스파이>
예스위캔
이 책은 먼저 국제정치 무대 이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정보전쟁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물밑에서 벌어지는 두 나라 사이의 정보전 양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지난 1997년 당시 클린턴 미 대통령은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이때 미국에서 활동을 하던 정보원이 클린턴 대통령이 르윈스키에게 폰섹스를 하려고 자주 전화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부장이던 야톰은 통신기술팀 '야호로민'을 미국에 급파해 르윈스키의 아파트를 도청한다.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적나라한 통화내용은 고스란히 녹음됐고, 이 테이프는 외교행낭으로 이스라엘 행정수도 텔아비브로 운반됐다. 모사드는 이 테이프를 향후 미국과 외교마찰이 불거질 때 활용하기로 방침을 정한다.
"모사드 본부는 그 녹음테이프의 활용 방안을 검토했다. 녹음 내용은 충분히 협박에 사용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을 협박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미국의 대중동 정책 때문에 막다른 궁지에 몰리거나 클린턴 대통령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 할 경우 활용할 여지는 있었다." - 본문 150쪽
이렇듯 정보전은 제임스 본드나 제이슨 본 같은 첩보영화 주인공이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는 액션활극이 아니다. 그보다 '국익'만이 지상가치인 국제정치 판에서 벌어지는 총성 없는 전쟁이다.
총성 없는 전쟁에서 모사드 요원들은 늘 혁혁한 공을 세워왔다. 이들의 활약상은 수차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먼저 이 책에 소개된, 지금까지도 스파이계의 전설로 회자되는 엘리 코헨의 예를 살펴보자. 엘리 코헨은 이집트 출신 유대인으로 모사드에 지원했다가 불합격 처리됐다. 그러나 시리아에서 활약할 정보원을 찾던 아미트 부장의 눈에 들어 정보원으로 선발된다. 이후 6개월간의 훈련을 거쳐 시리아에 잠입한다.
"코헨은 무역업자로서 시리아 수도에 순조롭게 정착했다. 고위층 인물들과 빠르게 친분을 쌓아 갔다. 그가 만난 고위층 인사에는 시리아 대통령의 조카인 자레딘도 있었다. 자레딘은 과시욕이 강한 인물이었다. 수시로 시리아가 얼마나 강한지를 자랑하고 싶어 했다. 코헨은 자레딘의 이런 성향을 부추겼다. 자레딘은 얼마 되지 않아 코헨으로 하여금 골란 고원 방어 진지를 돌아보도록 주선했다. 코헨은 그곳에서 러시아제 장거리포들이 콘크리트 벙커 깊은 곳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았다.코헨의 활약은 실로 눈부셨다. 러시아 탱크인 T-54 200대가 시리아에 들어온 지 수시간 만에 코헨은 이 사실을 텔아비브에 보고했다. 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시리아의 전략 계획서의 청사진까지도 입수했다. 이 정보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사람의 공작원이 한 개 사단의 가치를 지녔다는 아미트의 평소 지론을 코헨이 입증해 주고 있었다." - 본문 95~96쪽모사드의 활약상 중에 지금도 유명한 건 아돌프 아이히만 체포작전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모사드는 아돌프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 학살 원흉으로 지목하고 집중 추적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목격됐다는 제보가 접수됐다.
모사드는 즉각 작전에 돌입했다. 유대인의 시선으로 볼 때 아이히만 체포는 정의구현이었다. 또 국제사회에 나치의 학살행위를 다시금 일깨울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의미가 깊은 만큼 위험 부담도 따랐다. 아이히만이 목격된 아르헨티나는 나치 잔당들이 다수 은신해 있었다. 체포도 체포지만 그를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당시 부장이던 에이탄은 요원들과 함께 직접 아르헨티나로 날아가 작전을 지휘했다. 일단 아이히만의 동선을 파악한 다음 그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문제는 그를 공항까지 인도하는 일이었다. 에이탄 부장은 꾀를 냈다.
"에이탄은 아이히만에게 사전에 준비한 항공사 엘알의 승무원 복장을 입히고 위스키 한 병을 강제로 먹여 인사불성으로 만들었다. 에이탄과 그 일행도 승무원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술 냄새가 나도록 옷에다 위스키를 뿌렸다. 아이히만의 머리에는 승무원 모자를 눌러 씌운 후 차 뒷자리에 밀어 넣었다. 공군 기지에 대기 중이던 비행기는 이미 시동을 걸고 있었다. 기지 입구에서 아르헨티나 군인들이 깃대를 내리고 차를 세웠다. 차 뒷자리에는 아이히만이 코를 골고 있었다." - 본문 118쪽 모사드의 작전은 세계를 경악시켰다. 이들은 이후에도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한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검은 9월단' 조직원들을 모조리 제거하는가 하면 1976년 우간다 엔테베 공항 인질구출 작전을 성공시키며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열악한 안보상황, 강한 정보기관으로 귀결 모사드는 정보력, 그리고 요원들의 잔혹성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무엇이 모사드를 있게 했고 그 조직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만들었을까?
저자는 이스라엘의 열악한 안보환경을 이유로 들었다.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지중해와 아랍권을 연결해주는 지역에 위치해 있던 탓에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 등 주변의 강대국들로부터 잦은 외침에 시달려야 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기록이 이스라엘 민족의 고달픈 역사를 말해준다.
이런 이스라엘이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선택한 게 바로 정보전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구약시대부터 정보전에 능했다. 구약성서 <신명기> 1장의 기록을 살펴보자. 모세는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유대민족을 이끌고 마침내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었다. 이때 모세는 12명의 정찰대를 꾸려 가나안 일대의 정찰을 지시한다. 말하자면 현대적 의미의 첩보전이었던 셈이다.
이스라엘은 건국 후 주변 아랍세계와 전쟁을 벌여야 했다. 개전 초만 해도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아랍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승리는 이스라엘의 몫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하가나'라는 준군사 조직을 꾸려 정보역량을 강화해 왔고, 이들의 정보력이 아랍의 군사력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고난의 역사를 통해 정보전을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로 인식해왔다. 따라서 강인함과 함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무자비함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