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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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을 해주겠다는 약속에 고무돼 한국 강점을 열심히 도운 일진회 회원들은, 강점 보름 뒤인 1910년 9월 12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통감부 휘하의 경무통감부에서 한국인 정치단체의 해산을 요구해온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10월 1일부터 가동됐고, 그 전날까지는 기존의 통감부가 한국을 지배했다.
통감부의 해산 통보는 모든 한국인 정치단체를 대상으로 했다. 한국 강점을 반대한 단체들은 물론이고, 적극 협력한 일진회도 포함됐다. 이 통보에 따라 1910년 9월 26일 일진회는 해산됐다. 한국 강점이 성사된 이상, 강점을 반대한 단체는 물론이고 강점을 지지한 단체도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래서 일진회가 토사구팽을 당한 것이다.
토사구팽과 동시에 금전적 대가의 약속도 사라졌다. 300만 엔 아니 3000만 엔이라도 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약간의 금전이 해산 당시에 제공됐다. 그런데 금액이 약속과 너무나 달랐다. 일진회 회원들이 황당함과 불쾌감에 더해 치욕감까지 느낄 만한 수준이었다.
지급된 비용은 15만 원이었다. 일진회가 1910년 1월부터 9월까지 지출한 비용만도 근 8만 원이었다. 그런데 1905년부터 5년간 일본에 충성한 대가로 15만 원을 받은 것이다. 만주에 새로운 터전을 만들기에는 어림도 없는 금액이었다.
1910년 당시, 쌀 1가마니가 5원 정도였다. 15만 원이면 쌀 3만 가마니였다. 당시 일진회 회원이 14만 명 정도였다. 회원 네댓 명한테 쌀 1가마니 분배할 수 있는 돈이었던 것이다. 양심과 동족을 판 대가치고는 너무 적은 액수였다. 차라리 한 푼도 안 줬더라면, 기분이라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일진회가 받은 충격이 회장 이용구의 반응에서 나타난다. <송건호 전집 12>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일제에 의해 배신당한 이용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체념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온 지난날의 고문 우치다 료헤이의 손을 잡으며 '우리는 아무래도 어리석었던 것 같다'고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리석었던 것은 우치다를 포함한 '우리'가 아니라 이용구 자신이었던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인가. 이용구는 배신의 충격이 너무나 컸던지, 병합이 이루어진 얼마 후 병석에 눕는 몸이 되었다."이용구는 1912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45세였다. 너무 약소한 '금일봉'을 받고 병석에 드러누운 이용구와, 만주 개척의 꿈이 깨진 일진회 회원들의 모습은 외세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얼마나 쓸쓸한 최후로 연결되는지 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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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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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앞잡이 노릇 했다 '토사구팽' 당한 일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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