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의 한국사> (김종성 지음 / 을유문화사 펴냄 / 2017. 8 / 358쪽 / 1만6000 원)
을유문화사
나는 이 글에서 정파적 논쟁에 주목하지 않으려 한다. 이미 기존의 역사서들이 이 책처럼 도드라지게 다루지 않았을 뿐이지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저자가 책에서 '비선실세'라는 난을 따로 두어 기록한 시대별 비선실세에 꽤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국정농단의 주인공 비선실세 최순실이 재판 중인 시대적 요청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이 글에서는 저자가 가르쳐주는 시대별 비선실세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이름을 들어 본 이들도 있고 생소한 이들도 있다.
저자의 말처럼, '정치는 파벌을 배경으로 하기 마련'이고 파벌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자가 있으니, 바로 비선실세들이다. '정치 면허증을 구비하지 못한 이들'이란 비선실세에 대한 저자의 규정이 이채롭다.
백제에는 도림이란 승려가 그런 자였다. 백제인이 아니면서 백제의 국운을 흔들어 놓은 인물이다. 이를 이유로 저자는 최순실 보다 한 수 위로 본다. 불교 승려의 위상이 한창일 때인 5세기 후반, 백제를 무너뜨릴 목적으로 고구려의 장수태왕이 보낸 첩자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걸 미끼로 바둑친구가 되어 왕의 마음에 허영심을 불어넣었다. 허영심에 불탄 개로왕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의 원성을 사고 국고를 바닥나게 만들었다. 장수태왕이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를 치는 것은 너무 쉬울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백제 정복과 백제의 멸망에는 비선실세 도림 승려가 있었다.
신라에는 팜므파탈 미실이 있었다. 세 왕의 후궁이 되면서 삼대에 걸쳐 신라를 흔든 인물이다. 왕위계승을 좌지우지하고, 동륜태자의 죽음, 진지왕의 죽음, 김유신의 등극 등 굵직굵직한 사건 뒤에 미실이 있었다. 저자는 그녀가 후궁으로 이리 대단한 실력을 보인 것은 '육체의 기술'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실은 대원신통 혈통으로 진흥왕의 후궁이 되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진흥왕의 아들인 진지왕의 후궁도 되고, 더 나아가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의 후궁도 되었다. (중략) 남자 왕족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육체적 기술 또한 대단했다. 이것이 미실을 세 왕의 후궁으로 만든 비결이다." - 107쪽고려에는 스스로 고자가 된 고용보가 비선실세였다. 몽골 조정 소속으로 고려 충혜왕을 몽골 사신에게 넘겨 왕의 직무를 정지시킨 인물이다. 왕이 없는 고려에서 막강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정국을 수습한 인물이다. 저자는 충혜왕의 직무가 정지된 날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직무가 정지된 날과 같다고 말한다.
"국회 탄핵소추로 박근혜의 직무가 정지된 날은 2016년 12월 9일이다. 충혜왕의 직무가 정지되고 고용보가 직무를 대행한 날은 계미년 11월 22일이다. 양력으로 하면 1343년 12월 9일이다. 황교안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기 673년 전에 고용보가 주상 권한 대행이 됐던 것이다." - 157쪽조선의 승려 보우, 김개시, 진령군, 전두환 정권 때 제임스 릴리까지봉은사 주지였던 보우는 1548년 문정왕후를 알게 되면서 일약 정치 투쟁의 선봉에 선다. 유교 세상에서 불교의 승려가 헤게모니를 잡고 불교 전파에 앞장섰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불교를 전파했던 것은 그가 비선실세였기 때문이다. 종교와 정치의 결탁은 요즘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김개시는 어떤가. 광해군 시대의 막후실세인 김개시는 광해군의 여자로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의 여인(후궁)이기도 했다. 신라의 미실과 마찬가지로 '여자의 힘'으로 왕들을 쥐락펴락했다. 영창대군 대신 광해군이 왕좌에 오른 것은 김개시의 책략 때문이다. <인조실록>에는 인조가 먹을 약밥에 김개시가 독을 풀었다는 기록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이첨도 김개시의 결제를 받아야 했을 정도라고 저자는 쓰고 있다.
신선교의 무녀 진령군은 명성황후를 등에 업고 활약했던 조선 후기 숨은 실세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최태민이 있었다면 명성황후에게는 진령군이 있었던 것이다. 명성황후가 일본의 위력 때문에 은신처를 전전할 때 곁에 와 도운 진령군은 1882년 9월 황후의 환궁 때 같이 궁에 들어와 이후 본격적으로 핵심부의 역할을 했다.
"진령군의 '군'은 왕자급의 고위 직급이다. (중략) 공식적인 직책 없이 정치에 관여하여 전형적인 비선실세가 된 것이다. 인사권까지 개입했다는 것은 진령군이 국정운영에도 깊이 개입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치 자금을 많이 모았음을 뜻한다. (중략) 건강까지도 챙겼다." - 258쪽어쩌면 이렇게 최순실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와 흡사한지 모르겠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라 했던가. 책은 전두환의 쿠데타로 우리나라가 급격한 소용돌이에 휩싸일 때 비선실세는 당시 미국 대사 제임스 리(한국명 이결명)였다고 주장한다. 그가 우리나라에 공식 직책 없이 가장 막강한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이 주장이 꽤 타당성이 있다.
책은 고조선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파벌의 승패에 따라 정치의 판도가 바뀌었음을 말해 준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고 승자는 당파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다. 박근혜 이후 보수 진영은 이 싸움에서 졌다. 문재인 정부는 이 싸움에서 이겼다.
그러나 앞으로의 싸움은 이길 것인지 질 것인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 국민이 그를 어떻게 보느냐 또는 변수인 숨은 실세는 없느냐 등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앞으로 이 책의 관점에서 지켜보는 것도 꽤 흥미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쟁의 한국사 - 고조선부터 현대까지, 대립과 파벌의 권력사
김종성 지음,
을유문화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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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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