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때 전망대가 건립되어 '평화전망대'란 이름을 얻었으나 이명박 정부 때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로 이름이 바뀌어졌다.
이승숙
어쨌든 1960~70년대 우리 동네의 그 아지매는 철천지원수인 버스 정류소 집을 보지 않으려고 늘 걸어서 다녔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정류소 앞을 지나가야 할 경우에는 절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꼿꼿하게 고개 들고 걸어갔습니다. 쪽 찐 머리에 앙다문 입술의 결기 어린 아지매의 모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한국동란 전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벌써 60년도 더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 부분에서는 쉬쉬하는 분위기입니다.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이였을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고 했지요. 그중에는 죄도 없이 처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피해자 가족들은 얼마나 원통하고 절통할까요. 그래도 큰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죽은 듯이 살아왔지요. 그들은 죄인의 가족이었고, 그래서 가슴앓이하면서 숨죽이고 살았을 거예요.
민간인 희생자들의 원통한 죽음강화도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은가 봐요. 예전에 책을 한 권 봤는데, 바로 강화도 민간인 학살에 관한 책이었어요. 그 책에 의하면 강화도에서 좌익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사람이 몇백 명에 달했습니다. 강화대교 근처에는 그때 숨을 거둔 사람들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있는 곳이 있더군요. 언젠가 전등사 근처의 산길을 걷는데 역시 위령비가 있더군요.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을 듯한 외진 곳에 그 비는 있었습니다. 그곳 역시 학살의 현장인 듯했습니다.
우리 친정집의 먼 친척 중에도 그렇게 죽은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친정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돈을 좀 먹였으면 풀려났을 텐데 돈을 안 써서 죽었다고 하더군요. 어지러운 세상이었으니 무엇인들 제대로 된 게 있었을까요. 뒷돈을 좀 먹였다면 풀려날 수도 있었다니, 돈 없고 배경(빽)이 없는 사람만 억울하게 생목숨을 잃은 것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