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산 윤윤기 선생 기념비 앞에 선 기자
이윤옥
당시 교사 생활 15년을 채우면 평생 연금인 '은급(恩給, 일제강점기에 정부 기관에서 일정한 기간 일하고 퇴직한 사람에게 주던 연금)'을 받아 그런대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음에도 학산 선생은 은급 지급 기준일을 한 달 앞두고 민족교육에 투신하고자 사표를 냈다. 그리고 1939년 보성군 회천면에 무상교육기관인 양정원을 세웠다. 양정원은 월사금을 한 푼도 받지 않는 데다가 공책이나 연필 등 학용품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말하자만 학산 윤윤기 선생이 세운 양정원은 한국 최초의 무상교육기관인 셈이었다. 양정원은 1947년 폐교할 때까지 2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에 앞서 1933년에는 천포간이학교를 세워 어린이들에게 민족교육을 시작했다.
"저는 4학년 때 학산 선생님에게서 배운 제자입니다. 들어가자마자 히라가나부터 가르쳤는데 '시가츠와 하루노 하지마리다(4월은 봄의 시작이다)'라는 교과서 구절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총독부에서 낮에는 일본말을 가르치도록 지침을 받으셨는지 학산 선생님은 밤에 따로 한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헌 책이긴 해도 산수, 국어와 같은 책을 구해다가 우리들에게 주셔서 그것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오기순씨는 학산 선생님이 운영하던 야학에 대해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런가 하면 김순님씨 역시 스승 학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는 3학년 때 학산 선생님에게 배웠습니다. 집안이 가난해 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되었지만 양정원에서 무료 교육을 시켜 주는 바람에 한글을 깨칠 수 있었지요. 그때 학교는 건물을 짓고 있을 때라서 우리는 학교 뒤 양지바른 잔디밭에서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몇 달 뒤 완공된 건물이 태풍에 폭삭 주저앉아 버리자 학산 선생님은 피를 토하며 부서진 건물을 다시 세우느라 불철주야 고생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들도 수업이 끝나면 학교의 담장과 화단을 만드느라 학교 앞 바닷가에 가서 잔돌들을 머리에 이고 날랐지요."구순의 나이가 가까운 학산 윤윤기 선생의 두 제자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용케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일제 총독부는 입만 열면 조선인의 교육을 자신들이 제대로 시켰다고 궤변을 떨고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학산 윤윤기 선생처럼 사설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쳐 온 곳이 산재하고 있다는 것은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교육 외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중학교 1년, 고등학교 1년 만으로 각각 중·고교 졸업장을 받아 쥔 당찬 소녀 윤종순은 대학만은 정식 절차를 받아 들어갔다. 서라벌대학 문예창작과를 10회로 졸업했으니 당시 여자로서는 드문 일이다. 하지만 고학생이자 소녀 가장의 삶은 바뀐 게 없었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원망도 해보았어요. 일자리가 변변치 않을 때는 매혈(피를 뽑아 팜)이라도 해서 끼니를 때워야 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