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 서울 중구 천주교 인권위에서 군 의문사 피해자 고 김훈 중위 19주기 추모미사에 고 김 중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 중장이 참석하고 있다.
이희훈
그렇게 자랑스러웠던 이들 부자에게 비극이 시작된 때는 1998년 2월 24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후 만 19년하고도 6개월. 처음 국방부는 김훈 중위가 사망한 채 발견되자 자살로 공식 발표했다. 군 헌병대 수사관이 사건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발표된 '자살'이었다.
하지만 국방부의 기대와 달리 김훈 중위 사인 논란은 잠들지 못했다. 지난 19년 동안 끊임없는 자.타살 논쟁의 중심에서 뜨겁게 달궈졌다. 여러 번에 걸친 국방부와 국가기관 차원의 조사, 그리고 대법원에서도 자.타살 논쟁이 분분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국방부가 왜 이토록 많은 의혹과 의문에도 불구하고 김훈 중위 자살만 주장하는지' 나에게 묻곤 했다. 그럴 때 내가 내 놓은 답은 이것이다. 진실을 밝히는 수사가 아니라 '이미 내려진 결론에 맞춰지는' 조사가 국방부의 오래된 관행이라는 지적이었다.
김훈 중위 역시 다르지 않았다. 국방부는 '1984년 4월 2일 발생한 허원근 일병 사건처럼' 김훈 중위 역시 자살이어야 했다. 자살하고자 좌우 가슴에 각각 한발씩, 그래도 죽지 않자 자신의 머리 눈썹 사이에 다시 한 발을 쏴서 스스로 자살했다는 허원근 일병 사건처럼 김훈 중위 사인 역시 '억지 자살의 강변'이었다.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는 근거는 하나도 없고, 대신 타살 증거만 가득한데도 국방부는 이를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더구나 김훈 중위 사인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은 절대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간단하고 쉽다. 국방부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진실 때문이다. 바로 김훈 중위 자신의 오른손이 그 증거다.
국방부는 처음 김훈 중위 사망 경위에 대해 발표하면서 '자신에게 지급된 권총을 우측 관자놀이에 밀착한 후 방아쇠를 당겨 스스로 자살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반드시 뒤따라야 할 증거가 하나 있어야 했다. 바로 권총을 잡았다는 김훈 중위 오른손에 반드시 있어야 할 '화약흔'이 그것이다.
이는 미국에서 총기 사고가 나면 기준으로 삼는 증거였다. 우리나라와 달리 총기 사고가 빈발하는 미국에서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손의 화약물질 검사다. 그래서 만약 두 사람이 사망한 채 발견될 경우, 현장에 도착한 과학 수사대는 제일 먼저 사망한 이들의 손을 거즈로 닦는다. 그리고 분석한 결과 '누구의 손에서 화약 물질이 검출되느냐'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한다.
마찬가지로 김훈 중위가 국방부의 주장처럼 자살했다면 응당 그의 오른손에서는 화약 물질이 검출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진실은 무엇일까. 충격적이었다.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서 검출된 화약 물질은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깨끗한 손'이었다. 김훈 중위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관통한 총알을 당긴 손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만 19년 6개월 만의 순직 결정,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