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호수 전경. 예루살렘과 비교하여 변방이었던 갈릴리 지역은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사역하였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정수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은 예루살렘이지만, 사실 그가 활동한 주된 무대는 갈릴리였습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가 가지는 지역적인 특성과 상징을 의미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예루살렘은 중심지였습니다. 로마의 식민통치에 동조하는 세력과 율법의 권위에 의지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변화의 역동성보다는 현상 유지를 원하는 보수적인 지역이었습니다.
반면에 갈릴리는 호수와 평야로 이루어진 변방이었습니다. 남의 땅을 부쳐 먹고 사는 소작농들과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어부들이 있는 농어촌 마을이었습니다. 고단한 현실로부터의 변화에 대한 욕구가 크고, 식민 통치자 로마에 대한 저항감도 강한 곳이었습니다. 또한 힘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 그래서 더 많은 사랑이 필요했던 지역이었기에 예수는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는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한 예루살렘의 기득권 세력을 향해 거침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실리지 않은 형식적인 예배를 꾸짖었고, 로마에 굴복하고 그들의 통치를 받아들인 자들을 비웃었습니다.
당시 정치적인 기득권층은 로마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헤롯당이요, 종교적인 기득권층은 로마에는 부정적이나 율법에 대한 해석에서 매우 교조적이었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로마에 대한 태도로만 봤을 때는 결코 동지가 될 수 없었던 그들이 함께 예수의 죽음을 모의했다는 사실에서, 예수가 던진 사회적 메시지의 성격과 파급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는 예수가 가르침을 펴고 기적을 행했던 장소들을 기념하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종교 경전이나 신화에서 객관적으로 믿기 어려운 내용을 접했을 때 흔히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텍스트의 권위에 의존하여 덮어 놓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태도가 하나요, 터무니 없는 과장과 왜곡이니 무시하자는 태도가 다른 하나입니다. 두 가지 모두 바른 자세는 아닐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그 이야기가 전승된 이유, 상징 속에 담긴 의미를 보아야 본질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센병 환자를 고치고, 소경을 눈 뜨게 하고, 열병을 치료하고,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 장정을 먹인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하겠습니까?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선천적인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과 지체 장애인, 어린이 등은 사원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차별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그들에 대한 동정도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되는 사회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는 아픈 것도 서러운데 차별까지 당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다가가 그들의 고통을 함께 했습니다. 이적의 내용도 일확천금의 부를 만들어 주는 것, 혹은 사회적 성공과 출세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하되 함께 나누어 풍요를 느끼고, 신체적·육체적으로 고통 받던 이들에게 치유와 자유를 선사했던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평범한 이들의 고단한 문제에 천착했던 이적의 이러한 가치에 주목하지 않고, 신비로운 결과만을 찬탄하고 경외한다면 그것은 예수를 단순한 마술사로 격하시키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