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은 ’섯바구‘라고도 부르고 ’선바위‘라 부른다는 삽암(?巖?꽃힌 바위)에 관한 이야기를 안내판은 들려준다. 바위가 있는 곳은 옛날부터 영호남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니는 곳이다. 고려 무신정권 때 한유한(韓惟漢)이 처자식을 이끌고 와서 은거하며 낚시로 소일하던 곳이라 한다.
김종신
이후 한유한에 이야기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좌퇴계 우남명'으로 불릴 만큼 이황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지리산 유람에 나서 지은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삽암과 한유한의 삶을 기록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남명은 1558년(명종 13년) 음력 4월 11일 자신이 살던 합천 삼가를 떠나 진주목사 김홍, 고령현감 이희안, 청주목사 이정, 이공량 등 절친한 선비들과 진주, 사천을 거쳐 남해를 따라 섬진강 뱃길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닷새째, 배는 지리산 입구인 현재의 악양면에 이르렀다.
부조리한 시대에 맞선 고려 충신 한유한
남명선생은 기행문에서 "잠깐 사이에 악양현(岳陽縣)을 지나고, 강가에 삽암(鍤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녹사(錄事) 한유한(韓惟漢)의 옛 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가 혼란해질 것을 예견하고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징초하여 대비원(大悲院) 녹사로 삼았는데, 하룻 저녁에 달아나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아! 국가가 망하려 하니 어찌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있겠는가.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착한 사람을 선양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섭자고(葉子高)가 용을 좋아한 것만도 못하니, 나라가 어지럽고 망해가는 형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가득 따라놓고 거듭 삽암을 위해 길게 탄식하였다.." 라고 적었다.
남명선생은 이곳에서 부조리한 시대에 맞선 한유한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한유한을 통해 자신이 걸어가야 할 처사의 삶을 다잡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바위에 서서 강을 바라보는 내내 가슴이 벅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