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한 사면장홍순한 사면장 내용
김민정
홍순한은 사면되자, 바로 지역 사업에 착수했다. 어릴 적 일본 학교에서 배운 측량기술을 바탕으로 초등학교 근처 하천공사에 나선 것이다.
홍순한씨의 아들은 아버지 인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60대 중반인 큰아들(52년생)에게 없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전해주기로 했다. 이 기억은 아들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까. 우선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래는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그의 시점으로 정리한 것이다.
1. 출생 전우리 아버지 삶에 대해서 전체적으로는 모르지만 단편적인 이야기는 순간순간 들었지요. 집에는 일본 책이 많았어요. 책 속에 일본 여자와 찍은 사진을 본 적도 있고요. 아버지는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해방된 후 고국으로 돌아와 소위 좋은데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 말하는 '좌파 물'이 들어서 고생 많이 했지요.
한국전쟁 전에 사람들 불러 들어서 오라 할 때 가면 총살시켰다 아입니까.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보도연맹 가지 말라 했는데, 아버지 말 들은 사람은 살았고. '오라 캐라' 해서 간 사람은 죽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좌익들 다 죽일 때인데 외가 시골집 보면 지붕 아래 비었거든요. 아버지는 경찰이 잡으러 올까 봐 천장 위에서 약 3년간 살았대요. 이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용공분자 찍혀서 고생 몇 년 하다가 잡으려고 더는 안 오고. 명예도 회복시켜줬어요. 내는 아버지가 존경스러운 것이 어쨌든 간에 시대를 살다 보면 그 당시 좌익공산주의 거기에 물든 사람은 거기가 좋으면 지리산 골짝으로 갔다가 북한으로 가는데,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거기에 계속 빠져서 그런 길로 간 게 아니라 일반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와서 생활하셨지요. 1952년에 제가 태어났어요.
2. 출생 후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기억이 많이 나요. 그때 우리 집은 농사짓고 살았는데 아버지는 몇 달씩 나가서 측량 일을 했어요. 아버지가 일본에서 배운 측량기술로 갱남 지적도 도면 그리는 일을 했지요. 아버지는 갱남 안 돌아다닌 데가 없어요. 중학교 방학 때는 제가 아버지 따라다니면서 지적도 도면에 번지를 쓰곤 했지요. 그때 마산도 가보고 거제도 와보고.
부친이 사면장을 받을 때는 제가 객지생활을 했어요. 당시 <경남일보> 신문을 누가 갖다 주더군요. 사면됐다는 기사가 나왔어요. 그 후에 아버지는 지역사회 일을 많이 하셨어요. 계원초등학교 앞에 개울이 있는데, 개울이 3개로 분리돼 물이 차면 차도 못 오고 아무것도 못 와요. 비가 오면 사람이 죽기도 해서 공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빨갱이 아들' 손가락질받은 적이 있는지를 묻자) 그런 적 한번 없습니다. 내가 고등학교를 진주시내로 다녔는데, 버스 타고 동네를 수십 개 거쳐 가거든요. 내가 기억하기에는 "누구 아들이냐?" 물어봐서 답하면, 다들 "아 그렇습니까?" 하고.
그런데 ○씨라고 있었어요. 사사건건 부딪혔어요. 부모님은 이야기 안 하는데, 살다 보면 혹시 적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이 들지요. ○씨 아들은 저보다 한 살 많은데 학교도 같이 다니고, 마주쳐도 그런 이야기 안 해요. 서로 인사하지요. 사실 그 아들도 자기 아버지가 이야기를 안 하면 모르겠지요.
우리 부친은 그 지역에서 가장 똑똑하다 해서, 다들 물어보러 왔어요. 선거에 나가고 싶은 사람도 와서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물어봤고, 예전에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 될 때도, 평화통일자문회의. 그거 할 사람도 와서 "내가 하면 되겠느냐?" 물어보러 오고, 옛날에는 촌에 차가 안 다녔을 때라 집 앞에 지프 차가 오면 누가 인사하러 온 거죠. 경찰 서장이나 진양군수가 바뀌면 인사하러 왔어요.